태국이 러시아 부유층의 새로운 피란처로 떠올랐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끝날 조짐이 없는 상황에서 전쟁 불똥을 피하려는 이들이 반(反)러시아 정서가 강하지 않으면서도 생활이 편리한 태국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남부 휴양 도시 푸껫에는 올해에만 러시아인 40만여 명이 몰리면서 ‘러시아 밖의 러시아’가 되는 분위기다.
31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태국 정부는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러시아인 79만1,574명이 태국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러시아인 입국자가 1,000% 늘어났다.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러시아 국민 절반은 푸껫으로 향했다.
이들이 현금 보따리를 싸들고 오면서 태국 부동산 시장까지 들썩이고 있다. 현지 부동산업체 나이트프랭크 타일랜드 집계 결과 지난해 푸껫 섬 고급 빌라 매입 건수는 전년 대비 82% 늘었는데, 절반 이상은 러시아인이 구매했다. 모스크바 타임스는 “올해 들어서도 푸껫에서 338채의 빌라가 판매됐고 170채가량을 러시아인이 매입했다”고 전했다. 단순 관광 목적이 아니라 태국에 투자하고 뿌리를 내리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의미다.
지난해 2월 전쟁이 시작된 직후 러시아인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철권통치와 러시아 루블화 가치 하락을 피해 가까운 동유럽 국가나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등 중동 국가로 빠져나갔다. 서방의 경제 제재가 계속되고, 러시아 정부의 강제 징집령까지 더해지면서 동남아시아 국가로까지 눈을 돌리는 셈이다. 블룸버그는 “전쟁이 길어지면서 보다 물가가 저렴하고 기후가 온화한 태국 푸껫과 파타야가 러시아인들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국가는 러시아에 우호적이다. 아세안 10개국 가운데 유럽연합(EU) 주도의 러시아 제재에 적극 동참한 것은 싱가포르뿐이다. 나머지 국가들은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
이른바 ‘대나무 외교’로 불리는 중립적 외교정책을 표방해온 태국도 여전히 러시아와 정치·경제 분야에서 손을 잡고 있다. 태국은 지난해 4월 러시아의 유엔 인권이사회 퇴출 표결에서 기권했다.
태국은 같은 해 10월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등 우크라이나 4개 점령지에 대한 러시아 합병을 규탄하는 유엔 총회 결의안 투표에서도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태국과 러시아는 지금까지 쌀과 고무, 석유, 비료 제품의 교역을 이어가고 있다.
러시아인들이 몰려들다 보니 푸껫에선 러시아어가 영어와 더불어 또 다른 국제 공용어가 되고 있다. 푸껫 공항은 러시아어 안내 방송을 시작했고, 길거리에서는 러시아 키릴문자로 작성된 표지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고 블룸버그는 설명했다. 식당에서도 러시아 전통 음식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는 이달 17일 푸껫 중심가에 총영사관을 개설했다. 푸껫에 머무는 러시아인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행정 지원 필요성이 커진 까닭이다. 미국 주간지 롭리포트는 “푸껫은 곧 동양의 작은 러시아로 알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