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년차 변호사 시절이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는 유독 판사 이름과 검사 이름을 실명으로 현수막에 걸어놓고, 텐트를 치고 노숙하며,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던, 억울함이 가득한 눈에는 광기도 느껴졌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쁘게 그 앞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처럼 나도 무심히 그 앞을 지나쳤고, 솔직히 '뭐 저렇게까지'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2016년 5년 차 변호사가 되었다. 뉴스에서 굵직한 법조비리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며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는데, 사건의 면면을 살펴보며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들은 지난날 법원 앞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그 광기 어린 사람들이었다. 그중 어떤 사람은 정말 억울할 수도 있었겠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그렇게 함부로 생각하면 안 됐던 거구나라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2017년 3월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탄핵의 법적인 이유는 헌법재판소 결정문에 모두 나와 있지만, 그 이면에는 대한민국에 억울한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도를 넘었다는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해주지 않는 것, 억울함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 억울해하는 사람들을 귀찮은 존재로 취급하며 어떻게든 사건을 덮기에만 급급했던 태도가 시스템적으로 고착화하면서 억울한 사람을 계속 양산하는 문제 말이다.
과거사 문제를 조사하고 국가폭력,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진실화해위원회' 2기가 2020년에 출범한 지 3년이 되었다. 1기 위원회의 활동이 2010년에 종료된 지 10년 만에 국회의 극적인 합의로 진실화해법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여론의 관심을 받으며 합의를 촉발한 중심에는 형제복지원 생존 피해자들이 있었다. 2기 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을 1호 신청사건으로 접수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1987년 부산의 형제복지원에서 수용자들에 대한 불법감금과 강제노역, 폭행, 가혹행위 등 중대한 인권침해가 벌어진 사건이다. 1987년 사건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지 35년 만인 2022년에 진실화해위원회 2기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결론 내렸다. 단순히 민간 사회복지기관에서 벌어진 인권침해가 아니라 이른바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국가가 개입한 국가책임이라는 점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한 것이다.
새엄마의 구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산에 있는 친척집에 가려던 열 살짜리 소년이 부산역에서 사복형사들에게 잡혀 형제복지원으로 보내졌다. 매일 폭행을 당했고, 한겨울에 손에서 피를 흘리며 마대에 흙을 넣어 산까지 수십 번을 오르내렸다. 소년의 아버지는 아들을 찾기 위해 전국 곳곳을 헤메다 길거리에서 객사했다. 소년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작은아버지가 데리러 오면서 귀가조치됐고, 이후 마흔을 훌쩍 넘겨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도록 낮이나 밤이나 누가 잡아갈까 봐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가족들에게도 말 못하는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소년이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강제로 납치해서 가두고, 소년의 아버지는 왜 전국을 헤매다 객사해야 했으며, 왜 소년은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하는지 누가 해명하고, 누가 책임질 것인가. 과거의 국가에 의해 이루어진 폭력과 인권침해는 현재의 국가가 진실규명과 납득할 만한 해명과 피해회복을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 아닐까.
형제복지원 사건은 벌써 40년 전의 일이지만,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의 문제이고, 시대가 변했다고 하더라도 어떤 모습으로든 억울한 일은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게 언제 나의 문제가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