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우버' 그랩, 대규모 구조조정… 아시아도 덮친 미국發 테크 고용 한파

입력
2023.06.21 20:30
직원 1000명 정리해고 계획 발표
인니 '고투' 등 테크 기업도 감원

동남아시아 지역 최대 정보기술(IT) 기업으로 꼽히는 승차 공유 및 음식 배달 서비스 업체 그랩홀딩스(이하 그랩)가 대규모 감원에 나선다. 그랩은 그간 실적 부진을 탓하는 투자자들의 압박에도 인력을 줄이지 않았는데, 경기침체로 성장 둔화가 이어지자 결국 정리해고를 결정했다.

20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앤서니 탄 그랩 최고경영자(CEO)는 직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직원 11%를 정리해고한다고 밝혔다. 전체 직원이 9,900여 명인 점을 감안하면, 1,000여 명이 회사를 떠나게 된다. 이번 해고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초기에 360명을 내보낸 후 최대 규모다.

그랩은 ‘비용 상승’을 감원 이유로 들었다. 탄 CEO는 “변화가 이렇게 빠른 적이 없었다”며 “인공지능(AI) 같은 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이에 따라 자본 비용이 상승하면서 경쟁 구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건비 절약을 위한 감원 조치가 아니라, 사업 환경에 맞춘 전략적 조직 개편이라는 의미다.

‘동남아의 우버’로 불리는 그랩은 한국인들한테도 익숙한 브랜드다. 2012년 말레이시아에서 설립된 후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10개국 중 8곳에 진출했다. 이용자 수는 1억6,600만 명에 달한다.

그랩은 우버와 비슷한 승차 공유 서비스로 시작해 음식 배달, 디지털 결제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2018년에는 라이벌 우버의 동남아 사업 부문도 인수했다. 동남아 최초의 데카콘(기업 가치 100억 달러 이상인 기업·유니콘의 10배)이기도 하다.

그랩의 감원은 지난해 미국 주요 기술 기업(빅테크)에 불어닥친 고용 한파가 미국을 넘어 동남아까지 덮쳤음을 보여 준다. 지난해 미국발 금리 인상과 에너지 가격 상승, 이에 따른 전반적 물가 상승(인플레이션)이 한꺼번에 몰려오자 아마존, 메타, 트위터 등 미국 빅테크들은 직원 1만~2만 명을 내보내며 ‘몸집 줄이기’에 나섰다.

그랩을 포함,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던 동남아 대표 신생기업(스타트업)도 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 최대 기업 고투그룹은 지난해 말 직원의 약 12%인 1,300명을 감원했고, 올해 들어서도 600명을 더 줄였다. 동남아 최대 쇼핑 서비스 쇼피(Shopee)를 운영하는 싱가포르 전자상거래업체 씨(SEA)그룹도 최근 6개월에 걸쳐 7,000명 이상을 내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그랩은 지난해 말 “감원은 없다”고 선언하며, 그 대신 △신규 채용 동결 △관리자급 급여 동결 △출장 예산 20% 삭감 등에 나서는 방식으로 허리띠를 졸라맸다. 하지만 물가 상승과 고금리 속에 성장이 둔화하면서 결국 무릎을 꿇었다. 이날 미국 나스닥에서 그랩 주가는 4.7% 뛰었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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