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의 가마를 허(許)로 옮기는 계책이 마땅하다’고 대답했다. 정사 삼국지 동소전(董昭傳) 기록이다. 조조(曹操)도 ‘본래 자신의 뜻과 같다’고 응수했다. 우여곡절 끝에 수도 낙양을 장악했으나 여전히 제후의 틈바구니에서 불안했다. 천도를 단행해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했다. 조조가 역사의 중심에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동소의 발언을 사서가 남긴 이유다. 황제를 데리고 남쪽으로 수도를 옮겼다. 허는 지금의 쉬창(許昌)이다.
중원의 작은 현이었다. 196년 천도 후 한나라 도성이 됐다. 220년에 조조가 사망하자 아들 조비는 선양의 형식으로 위나라를 건국했다. 조조는 삼국시대에 승상과 왕의 지위만 유지했다. 조승상부(曹丞相府)로 간다. 한 손에 보검을 들고 있는 조각상이 멋지다. 높이가 6.95m다. 중국의 숫자는 항상 단순하지 않다. 역경의 점괘에 따르면 95는 제왕을 상징한다. 구오지존(九五之尊)이 그런 뜻이다. 소수점 이하까지 세심하다.
조조가 위왕에 오르니 왕부였다. 아들이 황궁으로 사용했다. 전란으로 훼손됐고 1,500년 동안 조조의 거처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2008년 다시 건축했다. 고증의 고뇌가 담기지 않아 밋밋해 아쉽다. 규모는 커도 속살은 빈약하다. 인재를 초청했다는 영현당(迎賢堂)이 나온다. ‘재능만 있으면 천거하라’는 유재시거(唯才是舉)를 반포한 구현령(求賢令)을 참고했다. 대사를 논의하는 의사청(議事廳)도 있다. 건물 바깥을 북으로 빙 둘렀다. 안에는 신하와 토론하는 장면이 연출돼 있다.
경극 가면이 도열해 있다. 경극의 인기 레퍼토리는 삼국지다. 무미하고 건조하게 둘러보다가 생기가 돈다. 흑백에서 컬러로 이동한 느낌이다. 경극은 가면 색깔로 캐릭터를 구분한다. 문인과 무인을 나누고 선악도 알아차릴 수 있다. 등장인물이 많아 가면만으로 누군지 알기 어렵다. 뒷면에 친절하게 이름을 적었다. 노숙, 사마의, 주유, 하후연, 관우, 제갈량 등이다. 하나하나 앞과 뒤를 맞춰봐도 거기서 거기 같다. 경극을 얼마나 많이 봐야 한눈에 알게 될까?
바로 앞에 3층 건물 부시루(賦詩樓)가 있다. 조조 삼부자 조각상이 있다. 모두 뛰어난 시인이며 명시를 많이 남겼다. 동탁 타도를 위한 회맹 시절에 쓴 호리행(蒿里行)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였다. 적벽 전투를 앞두고 노래한 단가행(短歌行)은 대장부의 기개를 표현하고 있다. 조조는 전쟁 중에도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조비도 다작이었다. 무엇보다 전쟁터에 나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연가행(燕歌行)은 시인의 감성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명작이다.
소설 삼국지에 일곱 발걸음 만에 시를 지은 조식(曹植)이 나온다. 진위 여부가 논란이긴 해도 당대 최고의 시인이다. 여신의 자태를 묘사하고 감정 이입한 낙신부(洛神賦)는 형식과 내용면에서 최고로 꼽힌다. 조조 부자 앞에서 시집이라도 들고 와서 하나씩 읊으면 어땠을까.
조벽에 새긴 그림이 낯이 익다. 조조가 북벌을 마치고 귀환하는 길에 지은 관창해(觀滄海)를 벽화로 옮겨놓았다. 시를 지었다는 허베이성 창리(昌黎)에 있는 갈석산을 오른 적이 있다. 조조처럼 바다를 향해 흉내 내던 시절이 떠오른다.
한나라의 마지막 연호가 건안(建安)이다. 25년 동안 조조가 정권을 통제하던 시기다. 전쟁만 하지 않았다.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몰두했다. 문화 진흥에도 신경을 썼다. 조조 삼부자만큼 특출한 일곱 명의 문인을 건안칠자라 부른다. 태자 시절 조비는 중국 최초의 학술 서적인 전논(典論) 22편을 집필했다. 정치,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대작이었는데 아쉽게 대부분 유실됐다. 역사의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일이 생겼다. 건안칠자를 기록한 부분이 3세기가 지난 후 소명문선(昭明文選)에 고스란히 담겨 전해지고 있다.
남조 시대 양무제(梁武帝)의 장남인 소명 태자 소통(蕭統)이 편찬했다. 526년에서 531년 사이로 알려진다. 130여 명에 이르는 작가의 작품 760여 편을 수록했다. 현존하는 문집 중 가장 오래돼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조승상부에서 건안칠자를 만나니 강남 수향 우전(烏鎮)이 떠오른다. 화려한 수향에 취해 그냥 지나치지만 관심을 가지면 소명 태자의 흔적과 만날 수 있다. 두 살에 태자로 책봉된 후 스승인 대학자 심약을 따라 우전에서 공부를 했다. 성년이 될 때까지 우전에 머물렀으며 역사에 길이 남을 문집을 완성했다. 안타깝게도 서른을 겨우 넘기고 요절했다. 소명서원이 있어 발자취를 볼 수 있다. 조승상부와 소명서원의 인연이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조조는 보저우(亳州)에서 태어났다. 쉬창에서 정동 방향으로 약 200km 떨어져 있다. 안후이성 북부에 위치하며 허난성으로 오목하게 들어온 지역이다. 그냥 중원이었다. 성 경계를 넘는 시외버스는 하루에 한두 편 있을 정도다.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시 인민정부 근처에 조조공원이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조조 조각상이 나타난다.
조비가 황제에 오른 후 조조를 위무제로 추증했다. 조조는 황제를 자칭한 적이 없다. 기념관 안에 위무사(魏武祠)가 있다. 조조가 근엄한 표정으로 좌정해 있다. 두 아들 조비와 조식이 양 옆을 지키고 있다. 문도무략(文韜武略)이 적혀 있다. 문무를 겸비하고 병법(韜)과 계책(略)이 뛰어나다는 말이다. 사당을 중심으로 양쪽에 조조와 관련된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정치가, 군사가, 문학가로 구분해 일대기를 엮었다.
소설과 정사가 혼잡스럽게 뒤섞였다. 전시물은 대부분 소설에 근거하고 있다. 예상은 했지만 조잡한 느낌이라 꼼꼼하게 보기 어렵다. 조조의 인생이 벽마다 수두룩하다. ‘천도 허현’에 눈길이 간다. 조조가 황제를 알현한 후 대장군과 제후에 임명되는 그림이다. 천도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활 쏘는 오락 코너가 있다. 뜬금없이 영화 적벽대전 포스터가 붙어 있다. 입장료가 30위안인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약간 허술하다.
조조와 동시대인이자 동향인 인물이 있다. 명의 화타(華佗)다. 서둘러 북쪽으로 4km 떨어진 화조암(華祖庵)으로 간다. 당나라 시대인 904년에 처음 세운 사당이다. 사당(祠) 대신 암자(庵)라 한 이유는 역대 주지가 비구니였기 때문이다. 지금 골격으로 1980년대에 보수했다. 입구에 돌로 만든 암수 한 쌍의 사자가 보인다. 약 20리 떨어진 마을의 관제묘에 있던 명나라 시대 유물이다. 1970년대에 옮겨왔다고 한다. 그곳의 관우와 복을 빌어야 하는 주민은 어쩌라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화타기념관'이라 적힌 담장이 있다. 낯익은 궈모뤄(郭沫若)의 필체다. 역사학자, 작가, 고고학자로 해방 후 부총리와 중국과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당대 최고의 학자라 전국에서 친필을 받고자 했다. 화조암도 마찬가지였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회신이 왔다. 봉투 안이 텅 비어 있었다. 겉봉투 수신 난에만 ‘화타기념관(華陀紀念館) 앞(收)’이라 적혀 있었다. 사람 인(人) 붙은 짊어질 타(佗)가 아닌 비탈질 타(陀)였다. 조심스레 예의를 갖춰 되물었다. 일부러 그렇게 썼다고 회신이 왔다. 화타의 의술은 살아있는 부처와 같다는 뜻이라 했다. 중국어로 부처를 불타(佛陀)라 한다. 발음과 성조까지 같다.
쪽문이 두 개다. 각각 회춘(回春)과 제세(濟世)라 적혀 있다. 병이 낫고 싶은 사람과 세상의 병을 구제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생각보다 선택이 어렵다. 대전과 배전이 차례로 이어진다. 백성을 위한 위대한 의사라는 존칭인 창생대의(蒼生大醫) 건물로 들어선다. 도포를 두른 화타가 앉았다. 복(福) 자를 쓴 동그란 종이가 잔뜩 깔려 있다. 건강이 곧 복이라는 생각이다. 무릎 꿇는 자리에 방석 하나가 놓여 있다. 재물을 불러오는 초재진보(招財進寶)다. 네 단어가 하나로 합체된 글자다. 재물과 건강 모두 바라는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다섯 명이 이상야릇하게 움직이는 조각상이 있다. 화타가 창조한 기공 체조인 오금희(五禽戲)다. 장자(莊子)에 기록된 양생 요법인 웅경조신(熊經鳥伸)에 착안했다. 곰이 나무를 휘어잡고 새가 발을 뻗는 동작이다. 곰과 새는 이금희다. 원숭이, 호랑이, 사슴을 추가했다. 오행과 오장을 연동해 체조를 개발했다. 동물의 동작을 응용해 간, 심장, 비장, 폐, 콩팥을 튼튼하게 한다. 신기하고 신비한 요술 같다. 국가급 무형문화재다. 정지 화면이라 아쉽다.
환자를 치료하는 그림이 있다. 소설 삼국지에 조조와 관우의 의사로 등장한다. 조조는 평생 두통을 앓았는데 화타가 뇌수술로 치료하자 했다. 조조는 의심이 도져 화타를 죽였다. 소설이니 그럴듯하다. 관우가 독화살을 맞았다. 화타가 뼛속까지 퍼진 독을 긁어내는 수술을 단행한다. 통증을 참으며 관우는 바둑을 둔다. 소설에서 관우는 영웅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이미 화타가 사망한 후라 드라마 같은 수술은 없었다. 그림만 봐서는 환자가 조조인지 관우인지 알쏭달쏭하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관우 사당이 있다. 보통 관제묘(關帝廟)라 하는데 별칭으로 화희루(花戲樓)라 부른다. 청나라 초기에 산시(陝西)와 산시(山西)의 상인이 건축했다. 두 성의 상인이 머무는 산섬회관(山陝會館)이기도 했다. 북방의 상인에게는 재물을 지켜주는 우상이었다. 철로 만든 16m 높이의 깃대 두 개가 솟아 있다. 용이 깃대에 몸을 휘감고 있다. 가까이 갈수록 딸랑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바람이 부니 주렁주렁 매달린 24개의 풍경이 오케스트라처럼 소리를 낸다.
섬세하고 풍성한 산문이다. 대문 옆에 양쪽으로 쪽문이 있어 넓다. 자금을 앞세운 상인이 만들어 다채롭고 화려하다. 전면이 명품 조각 공예로 범벅이다. 수직으로 쓴 참천지(參天地)가 보인다. 관우의 공덕이 천지와 필적할 만하다는 뜻이다. 큰 대(大)를 붙인 관제묘라 새길 만하다. 바로 아래에 곽자의상수도(郭子儀上壽圖)가 있다. 벽돌로 조각한 전조(磚雕)다. 재물과 명예, 장수 모두를 누린 인물이다. 구석구석 살피니 코끼리와 사자, 새와 사슴이 불쑥 튀어나온다. 문인과 무인도 등장한다. 숨소리나 몸짓까지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다. 장인의 솜씨를 빌릴 수 있는 상인에게 감사해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 뒤돌면 2층의 무대 공간과 마주한다. 6개의 기둥을 세워 만들었다.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처마와 기둥 사이에 용과 사자가 노려보고 있다. 장판파(長阪坡)와 공성계(空城計) 등 삼국지 고사가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수백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말과 수레도 있다. 연꽃이 피어나고 새가 날아가는 듯하다. 난간에 원숭이 한 쌍이 빙그레 웃고 있다. 복숭아 들고 있는 모습까지 해학이 넘친다. 목조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니 아름답기 그지없다. 대관제묘 대신 화희루라 부르는 이유를 알만하다.
계단 따라 무대 위로 올라간다. 정면 가까이에서 바라보니 병풍의 투각이 예사롭지 않다. 두 마리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논다는 이룡희주(二龍戲珠)를 구현했다. 구름 위로 용솟음치는 장관을 대칭으로 마주하게 꾸몄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부드러운 곡선으로 휘감고 있다. 옛 문화를 오늘날에 되새긴다는 연고풍금(演古風今)의 뜻도 그럴싸하다. 고개를 들어 위로 바라보면 조정(藻井)이다. 아홉 칸으로 나눠 원 안에 아홉 폭의 상징을 담았다. 고개가 아파 무대에 그냥 드러눕는다. 한가운데 원에 용과 봉황이 얼싸안고 있다. 용봉정상(龍鳳呈祥)이다. 금수(禽獸)를 하나씩 포획하느라 눈이 아프다. 기린, 학, 사슴, 박쥐, 코끼리까지는 찾았다.
화희루를 나와 약 500m에 이르는 라오제(老街)를 걷는다. 보저우 지역의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4개의 조각상이 나타난다. 화타의 오금희를 다시 만난다. 공자가 노자를 만나 예에 대해 묻는다는 공자문예(孔子問禮)가 있다. 노자 출생지와 관련해 논쟁이 있다. 보저우라 강조하려고 모셨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펼쳐 올리는 탕왕기우(湯王祈雨)도 있다. 기원전 1600년 전 상나라를 건국한 탕왕이다. 나라를 세웠더니 7년이나 가뭄이 심했다. 머리 깎고 기우제를 올렸다. 신화에 가까우니 출생과 사망을 특정하기 어렵다. 탕왕의 능원 중 하나가 보저우에 있다.
황제에게 술을 올리는 조조헌주(曹操獻酒) 조각상도 있다. 조조가 술잔을 황제에게 바치는 장면이다. 설명도 새겨져 있다. 196년이니 천도하던 해다. 조조가 고향에서 주정한 술을 바치니 황제가 기뻐했다. 궁정의 술로 삼았다.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조공 술이다. 보저우에 8대 명주인 고정공주(古井貢酒)가 있다. 스토리텔링과 함께 마시면 술의 향이나 맛도 훨씬 풍부해진다. 보저우에서 태어나 쉬창에서 대권의 꿈을 이룬 인물이다. 조조를 안주로 두주불사 자랑해도 누가 뭐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