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쓰레기에다 구제불능, 인간도 아니야.’
‘진’(30ㆍ활동명)은 자신을 향한 모든 기대를 내려놨다. ‘성매매를 벗어나려고 그렇게 발버둥 쳤는데 1년 만에 이렇게 되다니.’
내릴 곳을 지나쳤는데도 남자는 차를 세우지 않았다. “난 너 같은 애가 좋아.” “남자친구랑은 (성관계) 해 봤어?” “모텔 갈래?” 만 열일곱 살이던 그에게, 남자의 요구는 명백했다. “너무 어려 모텔에 못 들어간다”고 눙쳤지만 남자는 “무인텔도 있다”며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절대 그냥 보내지 않겠구나. 이러다 어디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거 아닌가.’ 두려움이 엄습했다. 유사성행위를 해 주고 차에서 빠져나왔다. 남자는 10만 원을 쥐여주며 말했다. “다음엔 30만 원 줄게.” 차에서 내려 펑펑 울었다. 성매매 경험자들은 폭력 피해 당사자 중에서도 자신들이 ‘가장 밑바닥’이라고 여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가 자신에게 ‘낙인’을 찍게 돼서다. 진도 그랬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가출했다가 ‘조건만남’을 하게 됐다. 함께 살았던 언니가 임신을 했다. 알고 보니 조건만남으로 진까지 먹여 살리고 있었다. 부모의 동의를 받지 못하는 청소년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주민등록증을 빌려 대형마트에서 주차 안내 알바를 해 보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누가 봐도 미성년자 티가 났을 테니까. 그런 진 앞에 놓인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1년을 조건만남을 하며 살았다. 그나마도 못해 돈이 없을 땐 난방이 되는 공중 화장실이나 온기가 있는 건물을 전전했다.
그러게 왜 가출을 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엄마를 때리다 못해 칼까지 든 아빠의 폭력, “네가 나랑 같이 죽자”며 아빠 차에 태워져 끌려가기도 여러 번이었다. 어린 시절 첫 기억이 난장판이 된 집일 정도니까. 그래도 아빠는 딸까지 때리진 않았는데. 나이가 드니 오빠가 아빠처럼 되어 갔다. 그의 결론은 ‘여기선 살 수 없다’.
어차피 집에 있어도 안전하진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오빠 친구에게 성폭력을 당했다. 채팅사이트 ‘버디버디’에선 그에게 성적인 사진을 요구하는 남자들이 가득했다. “만나자”며 나오라기에 가보니 50대 남자가 자기 사업장으로 부른 거였다. 간신히 성폭력을 피할 수 있었던 건 진이 당시 초경 중이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태어난 이래 18년 동안 진의 이야기다. 이후엔 어떻게 됐느냐고? 진은 성매매에서 벗어났다. 대학은 물론 대학원에도 진학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자신과 같은 피해를 경험한 청소녀들을 돕는 일을 한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 네트워크 ‘뭉치’의 일원으로 반성매매 운동과 활동가 교육, 토크 콘서트도 한다. 그는 지금 ‘무한발설’(2021년 뭉치가 출간한 책)하는 중이다.
자신을 포기하고 살던 그에게 자존감의 싹을 틔워준 한 사람 덕분이다. 그 자존감이 성매매를 실패가 아니라 인생의 디딤돌로 만들었다. 진은 말했다. “외딴섬이었던 내 주위에 섬들이 하나둘씩 생기고 이젠 그 섬과 때론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하며 사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이건 한 사람의 우주가 바뀐 스토리다.
-쉼터는 어떻게 가게 된 거예요.
“함께 살던 언니가 출산할 날이 다가와서요. 청소년 일시 보호소에 가니 선생님이 먼저 눈치를 채고 물어보더라고요. 어떻게 임신하게 됐는지, 성매매 한 건 아닌지. 언니는 미혼모 쉼터로 가고, 저는 성매매 피해 청소녀 쉼터로 가게 됐죠.”
그가 간 곳은 새날을여는청소녀쉼터(새날쉼터)였다. 새날쉼터에서 지내며 고졸 자격 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1년 만에 쉼터를 나가게 된 건 옛날에 함께 놀던 친구들이 들어오면서였다. 퇴소하고 지낸 그 기간에 차 안 성폭력을 당한 거다.
-그 사건을 겪은 뒤 어땠나요.
“밑바닥에, 밑바닥을 찍었다고 생각했어요. 탈성매매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탈성매매는 일시에 되는 게 아니에요. 내 주변의 환경이 다 바뀌어야 가능하죠. 그때도 친구를 만났다가 그 남자와 엮여서 놀러 간 거였어요. 친구가 조건만남을 하고 있었던 거죠.”
-실질적으로 벗어나기까지 오래 걸리는군요.
“환경뿐 아니라 감정도 그래요. 탈성매매 하고 난 뒤 얼마간은 종종 예전의 감정이 올라왔어요. 사람들에게 무시나 ‘갑질’을 당했다고 느낄 때 그렇죠. 착취당할 때와 우울할 때 감정의 밑바닥이 비슷하거든요. 그런 때는 ‘뭐야, 탈성매매 해도 달라진 게 없네’ 싶어요. 지금은 굳이 내 감정을 들여다보고 해석을 하죠. 또 그런 때 내가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공간과 내 마음을 말할 사람이 있다는 것도 떠올리고요.”
-그 사건으로 성매매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여겼겠네요.
“자포자기했죠. ‘나는 이런 애구나. 더 이상 할 게 없구나’ 싶었어요. 툭하면 ‘죽어버려야지’ 했고요. 나중에 쉼터에서 심리 상담을 받아보니 ‘만성 우울’이라 하더라고요. 그때는 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한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다가 우연히 스마트폰 부품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했죠. 잘 해서 ‘에이스’로 불렸어요. 몇 개월 안 돼 때려치웠지만.”
-왜요.
“생리통 때문에 하루만 쉬겠다고 하는데도 못 쉬게 하더라고요. 이게 말이 되나 싶었어요. 무식하다고 그러는 건가, 공장에서 일하니까 이렇게 대우를 받나 싶더라고요. 사이버대에 지원했는데 합격해서 공부를 제대로 해 보자 마음먹었죠.”
좀 의아스러웠다. 그는 이미 조건만남을 할 때 별의별 ‘인간 말종’을 많이 경험했다. 조건만남이란 ‘조건 성매매’인데 조건을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돈을 안 주고 되레 협박까지 하고 가는 남자들도 많았다.
-조건만남 할 때야말로 함부로 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는데 그때는 화가 나지 않았나요.
“그땐 그런 걸 느끼지 못했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취급을 받고 자랐으니까요. 성매매 할 때는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 늘 최악이었죠. 자존감이란 게 있었을지. 그런데 새날쉼터에서 전수진 선생님(전 서울시립금천여자청소년중장기쉼터 소장)을 만나고 달라졌죠”
-어땠기에 그런가요.
“선생님과 대화라는 걸 처음 해 봤어요. ‘이게 대화란 거구나’ 싶었으니까요. 나를 궁금해하고, 내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 주는 사람이 처음이었어요. ‘너는 이런 걸 잘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북돋아 주기도 하셨죠. 내 감정을 느끼고 알아차릴 수 있게 됐어요. 예를 들어 ‘저 짜증 나요’라고 하면 ‘네가 아니라 이런 상황 때문에 네 마음이 불편한 거야’라고 설명해 주셨어요. 선생님을 만나면서 관계 맺기, 의사소통 같은 걸 배웠어요. 자존감도 생겼죠. 그러니까 공장에서 부당한 처우를 당하고 화가 났던 거예요.”
-공장을 그만두고 쉼터에 들어간 건 학업 때문인가요.
“네, 쉼터를 나온 뒤에도 선생님들과 연락은 하면서 지냈거든요. 마침 제가 예전에 쉼터를 나간 원인이 된 옛 친구들도 다 퇴소했다고 하고요.”
-전공은 뭐였나요.
“상담심리학요. 어릴 때부터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사회복지학도 복수전공했죠. 고등학교도 제대로 안 다녔고 대학이 뭘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채 들어갔으니 모든 게 어려웠지만 열심히 공부했어요.”
실제 상담할 기회도 생겼다. 현재 십대여성인권운동센터로 확장한 사이버또래상담실이 막 생긴 터였다.
-비슷한 경험을 한 또래를 상담하니 어땠나요.
“처음에는 알바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다 보니 바뀌더라고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해석하다 보면 그 속에서 제가 보이기도 하고요. 나중엔 이런 일을 하면서 내가 받은 걸 돌려주고 싶다는 사명감이 생기더라고요.”
-성매매 하던 시절 몸을 뭐라고 생각했나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죠.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몸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을 쓴다고 생각했죠. 나를 버려서 살아가는 느낌이었죠.”
-탈성매매는 의지의 문제인가요.
“의지도 문제지만, 상황이 크죠. 성매매 현장을 벗어나서 쉼터에 가면 끝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다들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어요. 그 환경이 모두 바뀌어야 해요. 탈성매매 한 직후에는 주변 인간관계도 모두 성매매와 관련된 사람들이거든요. 그 인간관계도 다 끊어야 해요. 나를 믿어주는 친구나 선생님 같은 인적 자원도 생겨야 하고요. 거기다 직장 같은 물리적 자원이 갖춰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죠. 그러니 국가가 개입해야 해요.”
-본인도 오랜 시간이 걸렸겠군요.
“한동안은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20대 초반까지는 그때에 계속 머물러 있다고 느꼈죠. (성매매 경험 당사자 네트워크) 뭉치 활동을 하는 것도 해소의 연장선이에요. 제가 대화라는 걸 할 수 있게 되면서 엄마와도 처음 대화를 했거든요. 그때 초등학교 때 성폭력을 당한 얘기도 처음으로 했어요. 엄마는 ‘왜 그때 얘기 안 했느냐’고 했죠. 내가 무슨 얘기를 하든 한 번도 들어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어요. 엄마는 ‘성매매도 잊고 살아라, 그럴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잊고 살아요. 그 경험으로 내 청소년기가 몽땅 저당잡혔는데.”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결국 가족이 시작이죠. 내겐 아무런 사회적ㆍ정서적 지지가 없었어요. 자원이 하나도 없었죠. 없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어릴 땐 다 내 잘못이라고만 생각했죠.”
-성매매 경험 당사자 네트워크 뭉치 활동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뭉치가 ‘무한발설’이라는 토크 콘서트를 하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성매매 경험 당사자로서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 거예요. 멋있고 놀라웠어요. 저도 쉼터에 있을 때 연구자나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제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인터뷰 대상인 나는 힘들고 불편했어요. 너무 불쌍한 사람으로 그려지거나 하나의 사례로 쓰였죠. 왜곡되기도 쉽고요.”
-그런데 뭉치 멤버들은 당사자로서 직접 말을 한 거군요.
“맞아요. 그때 처음 깨달았어요. 당사자로서, 내 입으로 직접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걸. 그래서 뭉치에 들어갔어요.”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어떤 느낌이었나요.
“재미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만나면 슬픈 얘기만 할 거라고 예상할지 모르겠지만, 아니에요. 언니들은 이미 한 단계 넘어선 사람들이거든요. 우리끼리 알아들을 수 있는 농담도 하고요. 그 자체가 힐링이었어요. 눈치 보지 않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 주는 힐링. 게다가 이 사람들은 내가 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요. ‘찐 공감’이란 거 있잖아요.”
-그것이 주는 의미가 컸겠네요.
“내가 온전한 느낌이죠.”
-‘온전한’ 느낌요?
“네, 항상 나는 그간 내 삶의 한 부분을 숨겨야 했어요. 나란 사람은 여러 경험을 했고, 그것이 모여서 내 정체성을 이루잖아요. 그런데 그 경험 중 성매매는 얘기할 수가 없거든요. 그걸 말 안 하려다 보면 말이 이상해져요. 연결이 안 되죠. 거짓말하기는 싫고요. 그러니 입을 다물게 돼요. 그런데 뭉치에선 다 말하고, 다 물어봐도 되잖아요. 그러니 온전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뭉치는 2021년 11월 단행본 ‘무한발설’을 냈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들의 말을 엮은 책이다. 안마방, 집결지, 섬 다방, 텐프로(룸살롱), 조건만남 같은 성매매 당사자 여성들이 현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성매매의 실상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야 하는 성매매의 본질은 무엇인지, 왜 사회 구조적인 문제인지 말한다. “성매매 현장에서 돈은 권력이고 절대 권력자는 구매자 남성”이기에 “돈으로 용인되는 폭력” 그것이 성매매라는 것이다. 최근엔 ‘무한발설 일본판’이 출간되기도 했다.
-당연한 질문으로 느껴지겠지만, 성매매에 반대하는 이유를 듣고 싶어요.
“다른 사람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떤 느낌인지 상상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인간한테 너무 나빠요. ‘나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낙인찍게 만드니까. 성폭력과 성매매를 다르게 보는 시선도 있는데 성을 착취한다는 본질은 같아요.”
-성매매는 개인의 실패인가요, 사회의 실패인가요.
“국가의 실패로 생각하고 개입해야 해요. 대개 가정에서 정서적 유대를 쌓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힘들 때 성매매에 유입되거든요. 요즘 심각해지는 ‘그루밍 성폭력’도 그런 결핍을 파고드는 거예요. 그런 이들을 보듬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복지 체계가 있다면 성매매를 할까요. 제가 만난 사람 중에 성매매를 하고 싶어서 한 사람은 없었어요.”
-내년이면 ‘성매매 피해자 보호법’ ‘성매매 처벌법’ 제정 20년이 되는데 아직도 성매매는 만연하고 이젠 디지털 성매매까지 극성이죠.
“산업이 돼버렸으니까요. ‘채팅 앱’도 남자가 쪽지를 보내려면 유료인 게 대부분이거든요. 집결지만 해도 그걸로 이득을 얻으며 먹고사는 생태계가 있고요. 성매매 피해자 지원은 잘돼있지만, 성 구매자 처벌은 너무 약해요. 여성을 상품으로 만드는 데 방관하는 건 국가의 실패죠.”
지난달 여성가족부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펴낸 ‘성매매 피해 아동·청소년 지원센터 2022년 연차보고서’만 보더라도, 피해자의 약 80%는 채팅 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같은 온라인 경로로 성매매에 노출됐다. 센터의 도움을 받은 피해자는 전년 대비 18.6% 증가한 862명이었다. 이들 중 14~16세가 45.6%로 가장 많았고, 17~19세가 36.4%, 10~13세가 6.2%였다.
-당사자 운동이 왜 필요한가요.
“당사자가 참여하지 않는 운동이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을까요. 당사자가 나서지 않으면 대상이 될 뿐이죠.”
-당사자로서 다른 당사자를 상담할 때 다른 점도 있겠고요.
“이 사람이 어떤 마음일지, 어떤 상황일지 잘 알 수 있죠. 저는 다 지나왔잖아요. 특히 청소년의 경우에는 상담받으러 와서도 다 얘기하지 않거든요. 속으로는 ‘(상담자를 향해) 이렇게 추악한 세상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겠어’ 하는 거죠. 그런 때 제가 먼저 ‘혹시 이런 일이 있었어?’라고 말하면 깜짝 놀라면서 그제서야 다 얘기를 해요.”
-본인 경험을 말하는 때도 있을 텐데 그럼 반응이 어떤가요.
“아이들이 ‘내 인생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쌤 이야기를 들으니까 나도 다르게 살 수 있구나 싶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직 어린데도 스스로 낙인을 찍었던 거예요. 얼마든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인데 그런 말을 하는 게 슬프죠. 나 역시 그랬어요. 저도 힘들었을 때 누군가 그런 말을 해 줬다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더 일찍 빠져나왔을 것 같아요.”
-대학원은 언제 진학했나요.
“대학 졸업하고 여러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했어요. 마음 한편에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죠. 일단 연습 삼아 대학원에 지원해 보자 싶어 원서를 넣었는데 된 거예요. 마침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해서 엄마와 함께 지내면서 대학원에 다녔죠.”
-대학원 생활은 어땠나요.
“처음엔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컸어요. 보통의 또래를 거의 처음 본 거예요. 대학원에 진학할 정도면 괜찮은 대학을 나와 부모의 안정적인 지원을 받는 학생이 대부분이잖아요. 저는 검정고시 출신에 대학도 사이버대라고 얘기하면 다들 흠칫하더라고요. 나만 여기서 다른 사람이구나 싶었어요. 그러다가 온라인 성매매 관련 프로젝트를 따내면서 주위의 시선이 달라지는 걸 느꼈죠. 저한테 뭘 물어보기도 하고, 정보도 공유해주고요.”
논문 주제는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범죄였다. 그 논문을 발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N번방 사건’이 터졌다. 매개만 달라졌을 뿐 그 역시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다. 그 경험이 연구 전문성의 밑거름이 된 거다. 이 연구를 하면서 자신이 당했던 피해 역시 객관적으로 분석해 볼 수 있게 됐을 테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또 변화한 게 있나요.
“공부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겠더라고요. 대학원에 다니는 것 자체만으로 내가 좋은 사람으로 비치는 걸 느꼈거든요. 보통의 내 또래는 이렇게 주위의 인정과 지지, 칭찬을 받으며 살아왔겠구나 생각했죠. 석사 학위를 받고 나서는 활동가로 일하고 싶은 생각이 커졌어요.”
-돌아보면,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는 뭐였나요.
“가족과 가족에 대한 마음의 실패요. 어릴 때부터 사랑받고 싶었거든요. 그건 누구나 가진 마음일 거예요. 난 그런 보통의 가족을 갖지 못한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힘들었어요. 그로 인해 많은 문제들이 파생됐죠. 버디버디도 결국 가족을 대체할 존재를 찾아 들어간 거고, 가출한 것도 마찬가지죠. 지금은 제게 전수진 선생님 같은 분들이 있어요. 원가족 간의 사랑은 아니지만 다른 모양의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됐죠.”
-나만의 언어로 실패라는 단어를 정의한다면 뭘까요.
“실패는 인생에서 그렇게 크지 않다. 실패는 늘 있는 거니까요. 예전엔 그러지 않았지만 지금은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되지 뭐, 안 되면 말고’ 해요. 지금 내겐 실패해도 다시 해 볼 수 있는 자원이 생겼잖아요.”
-그 실패의 경험들이 준 삶의 도는 뭔가요.
“미리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죠. 저는 미리 포기한 게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어요. 그래서 상담 온 아이들한테도 ‘일단 해 봐, 생각보다 잘될 수도 있다’고 말해요. 전 그 생각이 인생을 바꾼 거 아닐까 생각해요. 도전하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대학원을 가요. 원하는 대로, 꿈꾸는 대로 한번 해 보는 것 그게 참 중요하단 생각이 들어요.”
-탈성매매로 뭐가 바뀌었나요.
“내가 사는 세계가 바뀌었죠. 물론 오랜 시간 하나하나 다 만들어야 했지만.”
-그 전환점은 언제일까요.
“전수진 선생님을 만난 게 첫 터닝포인트죠. 그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저에게 ‘그다음’은 없었을 테니까. 선생님은 나를 알게 해 줬어요. 내가 나 자신을 잘 만날 수 있게 해 준 분이죠.”
인터뷰 후에 그가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저는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제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에요. 내 삶은 그랬다고. 제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는 함께해 줄 것이고 누군가는 비난할 거예요. 그저 저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제 곁에 서주길 바랄 뿐입니다. 제 이야기를 어떻게 들을지는 기사를 읽는 이들의 몫이겠죠. 저는 아무도 없는 외딴섬에서 하나씩 함께할 사람들을 만들어왔어요. 그렇기에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요.”
이 이야기의 마무리로 이보다 좋은 건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