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민감한 부위에 손가락이 닿았다는 것과 속으로 손가락이 들어왔다는 것은 구별되는 행위임에도 핵심 피해 경위 내용이 달라졌고, 유일한 증거인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이상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한국고교축구연맹 회장을 지낸 정종선씨의 '학부모 성폭행' 혐의에 대한 1·2·3심의 공통된 판단이다. 국가대표 출신인 그는 2001년 창단한 서울 언남고 축구부 감독으로 9년간 연승 행진을 벌이며 '우승제조기'로 불렸다. 그런 정씨에게 횡령·청탁금지법 위반 혐의에 학부모를 성폭행했단 의혹까지 더해지면서 비난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언론보도 직후 그는 대한축구협회에서 영구제명 징계를 받았고, 언남고 축구부도 해체됐다.
그러나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학부모 성폭행 의혹 관련 유사강간 및 강제추행 혐의는 올해 4월 무죄가 확정돼 정씨는 누명을 벗었다. 횡령 혐의만 유죄로 인정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사건 발생일 기준 4년이 지나 기소된 사건. 재판 개시 후 3년이 지나서야 내려진 결론. 정씨는 왜 성폭행 혐의로 수사를 받았고, 법원은 왜 그에게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언남고 학부모회 회원이었던 피해자 A씨에 대한 정씨의 강제추행, 유사강간 혐의 공소사실은 다음과 같다.
△2016년 2월 경남 진주의 한 노래연습장에서 A씨가 노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려고 할 때, 정씨가 갑자기 뒤에서 손으로 허리를 잡고 자신의 무릎에 앉혀 강제로 추행했다.
△2016년 3월 서울 강남구의 한 노래주점에서 정씨가 A씨의 팔을 갑자기 잡아당겨 무릎에 앉히고, A씨가 놀라 일어나려고 하자 뒤에서 가슴을 만지면서 다시 무릎에 앉혀 강제로 추행했다.
△2016년 4월 정씨가 서울 서초구 언남고 축구부 숙소 내 감독방 안에서 A씨 팔을 잡아 소파 위로 끌어당겨 강제로 키스하며 껴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A씨의 민감한 부위에 손가락을 넣어 유사강간했다.
공소장에는 사건 발생 시점과 장소, 정씨의 행위가 상세히 기재됐다. A씨는 경찰, 검찰, 법원에 수차례 출석해 진술하며 성폭행 피해를 주장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정씨를 무죄로 판단했다.
판결문 등에 따르면, 경찰 수사는 2019년 2월 28일 A씨 등이 경찰에 정씨의 후원회비 횡령 등 혐의를 제보하면서 시작됐다. 법원은 A씨가 처음 조사를 받을 땐 체육특기생 선발 의혹이나 횡령 혐의만 언급했을 뿐, 성폭력 피해사실은 일절 진술하지 않은 점을 주목했다. 같은 해 6월 2일에야 A씨는 강제추행 혐의를, 6월 13일에는 유사강간 혐의를 추가하는 등 정씨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진술하기 시작했다.
법원은 "다른 학부모들과 함께 있는 와중에 정씨가 가슴을 만졌단 점은 피해자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을 텐데, 경찰 조사가 시작될 때 바로 진술하지 않고 8개월 이상 진행된 시점에 비로소 처음 진술했다"며 수사 착수 배경에 의문을 제기했다. 또 "피해자가 공익제보자로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제보를 감행하면서 돈 문제보다 훨씬 심각한 불쾌감을 줬을 성적 추태를 제보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리 성폭력 피해자 대처 양상이 다르단 점을 감안해도 선뜻 납득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정씨의 성폭행 의혹을 증명할 수 있는 직접 증거는 피해자 진술이 유일한 상황에서, A씨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강제추행 및 유사강간 혐의와 관련한 A씨의 진술은 여러 수사기관을 거치며 시간이 지날수록 구체화됐지만, 최초 진술과는 다른 내용으로 수차례 변경돼 일관성이 없다고 본 것이다.
2016년 2월 노래연습장 강제추행 사건에 대해선 "정씨가 다리를 걸어 무릎 위에 넘어지게 했다"(고소장 적시)→"의도적으로 다리를 걸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경찰 조사)→"일부러 걸어 넘어뜨린 것 같다"(검찰 조사)→"강제로 앉힌 것 같진 않고 어쩌다 휘청거려 무릎에 앉게 됐다"(법정 진술) 등 A씨의 진술은 계속 바뀌었다.
정씨가 만졌다는 신체 부위도 '허리, 팔, 가슴'에서 '허리, 가슴, 배'로 바뀌었다가 법정에선 "가슴을 만지진 않았다"고 했다. 재판부는 "피고인과의 신체 접촉은 이 사건 당시가 처음이었기에 비교적 분명히 기억할 것으로 보임에도 가슴을 만졌는지 여부에 대한 진술 번복이 있었단 점은 이례적"이라고 짚었다.
2016년 3월 노래주점 강제추행 혐의 관련해서도, A씨가 처음엔 '무릎에 앉게 했다'는 진술만 했다가 5개월 정도 지나 '앞가슴을 움켜쥐었다'는 내용을 더한 점이 신빙성을 떨어뜨렸다. A씨의 진술은 "무릎으로 넘어지게 했다"(해바라기센터)→"양손으로 허리를 꽉 잡아 앉힌 뒤 앞가슴을 움켜쥐고 끌어당겼다"(경찰 조사)→"팔을 잡아당겨 무릎에 앉힌 뒤 가슴을 만지면서 다시 앉혔다"(법정 진술)로 변화했다.
핵심 혐의인 유사강간에 대해서도 법원은 A씨가 일관된 진술을 하지 못한다고 봤다. "정씨로부터 감독방으로 잠깐 올라오란 문자가 왔다"는 최초 진술은 "그땐 연락처를 몰라서 문자를 보낸 게 아닌 것 같다. 정씨가 '잠깐 올라와 보세요'라고 말했다"고 바뀌었다. 피해 내용도 "속옷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해바라기센터)→"손가락이 민감한 부위 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경찰 조사)→"민감한 부위에 손가락이 닿았고, 만지거나 주무르진 않았다"(법정 진술)로 변했다.
A씨는 "처음엔 남자가 조사했고, 해바라기센터에서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그 정도만 말해도 피해사실이 진술되는 줄 알았다"며 번복 경위를 설명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A씨의 진술 변화를 두고 "단순한 표현상 차이에 불과하다고 보기엔 행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 밖에 "신체 접촉은 보지 못했다"는 다른 학부모들의 진술, 감독방 구조 묘사와 관련한 '카펫'의 존재 여부, A씨는 '여닫이문'이라 했으나 실제론 '미닫이문'이었던 점 등 피해자 주장과 엇갈리는 정황들도 진술의 신빙성을 흔들었다. 재판부는 "범행 주요 부분의 피해 진술이 시간이 지날수록 정도가 확대되고 구체화되는 점은 피해자 진술 전반의 신빙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며 "법정에서도 구체적 피해 내용에 관해 질문에 따라 다른 진술을 하고 있어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했다.
A씨의 진술서가 대필된 점도 무죄 판단에 영향을 줬다. A씨는 2019년 6월 13일 해바라기센터 조사 직전 한 커피숍에서 경찰을 만나 피해사실 진술서를 작성했다. 앞선 조사에서 '강제추행 이외에 추가 피해는 없었다'고 밝혔던 A씨는 해당 진술서를 통해 처음으로 정씨의 유사강간 의혹을 제기했고, 강제추행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진술을 보탰다.
하지만 유일한 증거로서 증명력이 관건인 피해자 진술서를 A씨가 아닌 제3자가 쓴 점이 드러났다. 진술서를 대필한 인물은 수사를 지휘한 경찰 간부의 지인이었다. 정씨와 적대관계인 축구협회 간부의 측근이기도 했다. 진술서를 받은 경찰은 법정에서 "상사의 지시로 A씨를 따로 만났는데, 당시 A씨와 동행한 상사의 지인이 진술서를 대필해 제출했다"고 증언했다. 재판부는 "A씨는 그 후 진술서 내용대로 강제추행, 유사강간 피해사실 일부를 처음 진술하기 시작했다"며 "구체적 피해 진술내용이 제3자로부터 유도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A씨의 법률 대리인단은 "허위로 불리한 진술을 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이상 피해자 진술 신빙성을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고 항변했지만, 정씨의 성폭행 관련 혐의는 모두 무죄가 확정됐다. 정씨는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성을 알지도 못하는데 거짓 고소로 가정이 말살됐다"며 "명예회복에 인생을 걸겠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말 A씨와 진술서를 대필한 인물 등을 무고 혐의로 고소했다. 대한축구협회의 영구제명 징계에 대한 무효확인 소송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