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9일 감사원의 직무감찰(감사)을 직원 자녀 특혜 채용 의혹에 한정해 부분적으로 수용하기로 했다. 그간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감사원 감사에 '절대 불가'로 맞서다가 입장을 틀었다. 최근 여권을 중심으로 '선관위원 총사퇴'를 요구하며 비난 여론이 커지자 한발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선관위 고유 직무에 대한 감사원 감사는 헌법 정신과 어긋난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반쪽짜리 대책'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여전하다.
노태악 위원장을 비롯한 선관위원 9명은 이날 경기 과천 선관위 청사에서 회의를 열고 이같이 결정했다. 앞서 2일 회의에서 '위원 만장일치' 의견으로 감사원의 직무감찰을 거부하겠다며 완강했지만 불과 일주일 만에 입장을 바꿨다. 당시 선관위는 헌법 제97조와 국가공무원법 제17조 제2항을 근거로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날 4시간가까이 진행된 회의에서는 감사 수용 여부와 범위 등을 놓고 격론이 오간 것으로 전해졌다.
선관위는 입장 선회 이유에 대해 "최근 발생한 선관위 고위직 간부 자녀의 특혜 채용 문제에 대해 국민적 의혹이 너무나 크다"며 "의혹을 조속히 해소하고, 당면한 총선 준비에 매진하기 위해 이 문제에 관해 감사원 감사를 받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선관위는 앞서 '채용비리' 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된 박찬진 전 사무총장과 송봉섭 전 사무차장을 동시에 면직 처리하고, 자체 특별감찰을 통해 이들을 포함한 4명의 직원을 경찰에 수사의뢰하는 등 자구책을 내놓았다.
대신 추가로 직무 문제에 대한 외부기관의 개입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감사원이 선관위 직무에 개입하는 '나쁜 선례'가 생길 경우, 헌법기관으로서 선관위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우려를 내세우고 있다.
이에 선관위는 "행정부 소속 감사원이 선관위 고유직무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헌법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헌재에 권한쟁의심판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일단 감사에 응하지만, 감사원의 직무감찰 범위에 대해 법적 판단을 받아보겠다고 이의를 제기한 셈이다.
선관위원들은 자진 사퇴도 사실상 거부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선관위가 '와해'될 경우 선거 관리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선관위는 이날 '채용 비리' 의혹으로 물러난 송 전 차장의 자리에 허철훈 서울시선관위 상임위원을 임명했다.
하지만 선관위에 대한 국민 여론은 비관적이다. '자정기능'을 잃었다는 비판 여론이 고조된 상황이다. 선관위는 '채용 비리' 의혹이 불거진 이후에도 직원 업무추진비 부당 지출을 비롯해 방만한 제도 운영에 따른 '도덕적 해이' 문제가 잇따라 터져 나왔다. 여론조사기관 메트릭스가 연합뉴스·연합뉴스TV 의뢰로 3, 4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73.3%가 노 위원장이 사퇴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특히 내년 총선을 앞두고 선관위의 '편파성'을 의심하는 국민의힘이 연일 선관위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면서 '엄정한 선거관리'라는 존립 이유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민의힘은 노 위원장을 포함한 선관위원 9명 중 7명이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에 우호적인 성향을 가졌다며 선관위원 전원 교체를 통한 '재정비'를 요구하고 있다.
선관위가 '일부 감사 수용'으로 일단 급한 불을 껐지만 여전히 사면초가 신세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이날 선관위 '채용비리' 의혹과 관련해 최근 7년간 채용·승진 사례를 전수조사하고 선관위와 관련한 각종 비리·부패 행위도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에 더해 수사기관의 수사와 국회 국정조사를 앞두고 있다. 국민의힘은 전날 선관위 국정조사를 '감사원 감사 이후' 진행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선관위에 대한 강제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감사원은 이날 선관위의 부분 수용 발표 직후 입장문을 내고 "감사를 수용했으므로 현재로서는 감사 거부 등과 관련한 수사 요청 계획은 없다"며 "이미 조사를 시작한 국민권익위원회와 중복되지 않도록 협조해서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만 감사 수용 범위를 특혜 채용 문제에 국한한 선관위 결정에 대해 감사원은 "감사 범위는 감사원이 결정할 사안"이라고 일축해 불씨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