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6월 7일,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 회사 중역 200명을 모아 놓고 하루 여덟 시간, 사흘 동안 쉴 새 없이 연설을 이어갔다. 이 회장은 삼성의 중역들이 양적 성장과 한국 1위 기업에 만족하고 있다며 위기 의식을 느끼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훗날 '프랑크푸르트 선언' 또는 '신경영 선언'이라 불리는 이 이벤트는 30년이 지난 지금 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풍경이다. 먼 유럽에서 예정도 없이 돌연히 한국의 중역을 불러 모아 행사를 연 점과 극단적이고 거친 발언의 면면들이 그렇다.
하지만 이날의 선언이 삼성이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류 기업으로 남아 있게 하는 원칙이자 밑바탕이 됐다는 평가에는 이견이 없다. 삼성전자는 이때 각인한 '끊임없는 위기 의식'을 바탕으로 1997년 외환위기와 2009년 금융위기를 넘었 현재 메모리반도체, 스마트폰, TV 등에서 세계 최고 브랜드로 떠올랐다. 세계 브랜드 컨설팅업체 인터브랜드가 조사한 삼성의 2022년 브랜드 가치는 877억 달러(약 115조 원)로 세계 5위에 이르렀다.
7일 30년을 맞는 신경영 선언은 워낙 주목을 받아 오늘날에도 그 면면이 비교적 자세히 전해 내려온다. 당시 경영 전면에 잘 등장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듣는 데 치중했던 이건희 회장이 전격적으로 자기 의견을 내놓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 회장의 '격노'를 불러일으킨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①후쿠다 다미오 당시 디자인 고문이 전달한 현장 보고서로 삼성이 품질에 관심을 덜 가지고 디자인을 소홀히 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하나는 ②삼성의 사내 조사단을 통해 전달된 '몰래카메라'였다. 불량품 세탁기의 뚜껑 여닫이 부분이 규격에 맞지 않자 직원들이 즉석에서 뚜껑을 칼로 깎아내 다시 조립하는 장면이었다.
두 사건을 계기로 이 회장은 삼성 경영의 핵심 목표를 '양'에서 '질'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불량품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라인을 세워서라도 이를 개선하고 생산량이 줄어도 품질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이 곧바로 환영을 받은 건 아니었다. 임원 중에서도 "시장 점유율을 무시할 수 없다"며 양과 질을 동시에 잡자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이 회장도 완강했다. 프랑크푸르트에 이어 영국 런던과 일본 오사카·도쿄를 돌아다니며 총 48회에 걸쳐 강연했고 신경영 철학을 요약 정리한 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다.
'파격'은 실제 기업 운영에서도 계속됐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자는 목표로 '오전 7시에 출근해 4시에 퇴근하라'는 '7·4제'를 도입했다가 현실적 문제 때문에 물러서기도 했다. 1995년 불량 상태인 휴대전화가 대규모로 발견되자 경북 구미시 구미사업장에서 불량 휴대폰과 팩스기기들을 몰아넣고 직원 앞에서 불을 지른 이른바 '불량제품 화형식'은 신경영 선언의 효과가 떨어지자 충격 요법을 노린 대표적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철학은 '질 중심의 경영'으로 요약된다. 상품의 질뿐 아니라 사람의 질, 경영의 질도 모두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이 회장은 삼성의 비전을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설정하고 이를 "최고의 품질과 최상의 경쟁력을 갖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해 인류 사회에 이바지하는 기업"으로 정의했다.
이 회장은 특히 변화의 출발점을 '인간'으로 봤다. "나부터 변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개인의 자기 반성과 변화 의지를 유난히 강조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말도 이런 의도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창의적 핵심 인재'를 확보하고 양성하는 것을 기업 경영의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봤다. 이를 위해 학력과 성별, 직종에 따른 불합리한 인사 차별을 없애려 했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좋은 인재를 공격적으로 모셔왔다.
최첨단 기술 개발을 위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기술 인력을 우대했고 연구개발(R&D)에 대대적으로 투자했다. 삼성종합기술원(현재 SAIT)을 중심으로 차세대 연구를 하고 각 사업부에도 연구조직을 둬 제품 혁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는 신경영 선언 이전에도 성과를 내고 있던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이 30년 이상 세계 점유율 1위를 유지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1995년 불을 질렀던 휴대전화는 스마트폰 시대의 치열한 경쟁을 거쳐 '갤럭시'라는 이름으로 애플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는 삼성의 대표 상품으로 떠올랐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을 기치로 약 20년 동안 삼성을 이끌었다. 삼성이 메모리반도체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성과는 증명됐다. 다만 최근 10년에는 신경영의 시작이었던 과감한 비전 제시와 혁신이 제대로 나타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에 따르면 삼성은 내부적으로 올해 '신경영 30년'을 조용히 보낸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신경영 20년' 기념 학술 행사와 만찬 등을 열었던 2013년과는 사뭇 다르다. 여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신경영 20주년 행사장에서도 "자만하지 말고 위기 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비전 제시자' 역할을 했던 이 회장은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입원한 후 2020년 사망할 때까지 경영 일선에 돌아오지 못했다.
장남인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이 사실상 삼성의 총수 역할을 했지만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면서 삼성은 '오너(소유) 경영자'의 공백기를 맞았다. 2022년 10월에 비로소 삼성전자 회장에 취임한 이재용 회장은 사내 게시판에 남긴 취임사에서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돌이켰다. 삼성의 임원들은 "과감한 투자를 위해서는 총수의 역할이 절실하다"면서 경영 공백을 원인으로 꼽았지만 바깥에선 "재벌 가문과 기업은 별개"라는 목소리도 있다.
'신경영' 자체가 이미 낡은 틀거리라는 의견도 나온다. 재벌 경영을 비판해 온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내걸었을 때는 삼성이 아직 추격자였지만 지금은 최첨단에서 경쟁해야 하는 시기"라면서 "경영진도 신경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건 알면서 그동안 성공했던 그 방정식에서 벗어날 필요성은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