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까지 조롱한 사이코패스다.”
연쇄살인범 이기영(32)에게 살해당한 60대 택시기사의 딸이 이기영에게 사형을 선고해 달라며 온라인에 올린 글이다. 택시기사 딸은 1심 법원이 지난달 이기영에게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을 선고하자 사형 집행을 청원했다. 그러면서 “이기영과 같은 살인범이 더 이상 사회에 나오지 않도록 법 제도가 개선되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법원도 ‘잔인한 범죄자’로 칭하며 이기영에 대해 영구격리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그에게 가석방이 가능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1심 법원은 불과 6개월 만에 두 명의 무고한 사람을 죽인 이기영에게 왜 사형을 선고하지 않았을까.
30일 경찰과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이기영의 잔혹한 살인 행각은 크리스마스인 지난해 12월 25일 오전 드러났다. 택시기사 A씨의 딸은 “아버지가 전화를 받지 않고 이상한 문자만 보낸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A씨의 동선을 추적하던 중 용의선상에 오른 이기영 집 옷장에서 A씨 시신을 찾았다. 수사 결과 이기영은 5일 전인 12월 20일 밤 10시쯤 경기 고양시 도로에서 음주운전을 하다 A씨의 택시와 접촉사고를 냈다. 음주운전 누범기간이었던 이기영은 가중처벌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해 “합의금을 주겠다”며 A씨를 자신의 파주 집으로 유인했다.
통장에 17만 원밖에 없던 이기영은 A씨가 집에 들어오자 “합의금을 줄 수 없다”며 돌변했다. 이에 A씨가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이기영은 A씨를 넘어뜨린 뒤 집에 있던 둔기로 머리를 내리쳐 숨지게 했다. 음주운전 사실을 감추려 살인을 저지른 이기영은 범행 후 A씨의 주검을 옷장에 숨겼다. 이어 A씨의 신용카드로 물품을 구입하는 등 5,557만여 원을 빼앗기까지 했다. A씨를 애타게 찾던 A씨 가족에게는 “교통사고 처리 중이다. 연락하지 마라” 등 132회에 걸쳐 거짓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경찰은 이기영 손에 죽은 피해자가 추가로 확인돼 충격에 빠졌다. 이기영이 A씨를 죽인 파주 아파트의 소유주를 추적했는데, 이기영의 50대 동거 여성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생활반응이 수개월간 없었던 사실을 확인해 이기영을 추궁했고 추가 살인 범행을 자백받았다. 이기영은 2017년 유흥업소에서 처음 만난 B씨와 2021년 12월부터 함께 살았다. 동거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이기영은 B씨에게 “내가 건물 여러 채를 가진 소유주의 손자다. 자전거 관련 매장을 여러 개 운영해 재산과 수입이 많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무일푼 신세였다.
변변한 직업도 없었다. 아버지에게 빌린 돈으로 생활하던 이기영은 돈이 떨어지자 B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했다. 다툼이 잦아지고 빚 독촉 등 압박이 더해지자 이기영은 B씨의 재산을 노렸다. 그는 2022년 8월 3일 인터넷에서 ‘먹으면 죽는 농약’, ‘제초제 먹었을 때’ 등을 검색하며 범행을 계획했다. 독극물 구입이 여의치 않자 이기영은 당일 오후 3시쯤 집 안방에서 둔기로 B씨의 머리와 몸 곳곳을 10여 차례 내리쳐 살해했다. 이기영은 범행 후 태연하게 B씨 휴대폰과 신용카드 등을 빼앗아 8,124만 원을 사용했다. 시신은 차량용 루프백에 담아 파주 공릉천변에 내다 버렸다. B씨 시신은 10개월이 넘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심 판결문에서는 이기영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도 드러났다. 이기영은 2018년 결혼했지만 2021년 12월 숨진 B씨와 동거를 시작했다. 2022년 2월 이혼한 이기영은 곧바로 B씨와 재혼했다.
B씨를 살해하게 된 계기도 확인됐다. 이기영은 2022년 7월 코로나19 소상공인 지원금을 타내려고 허위 매출 세금계산서를 발급했다가 부과된 360만 원의 체납 세금과 230만 원의 백화점 카드 연체대금 압박이 이어지자 B씨 돈을 강탈하기로 마음먹었다. 한 달 뒤 이기영은 B씨 명의의 아파트와 은행 예금 등을 빼앗기 위해 살해계획을 세웠다. 이기영이 성인 재범위험성 평가 척도(KORAS-G)와 정신병질자선별도구(PCL-R) 평가에서 ‘다시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며 재범 위험성이 높게 나타난 사실도 확인됐다. 이기영은 검찰 수사 단계에서 사이코패스로 분류됐다. 대검찰청 통합심리분석 결과에 따르면, 이기영은 자기중심성과 반사회성 특징을 보이고, 자신의 이득 앞에선 감정과 충동조절능력이 부족한 성향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1심 재판부는 지난달 19일 “이기영의 재범 가능성에 대해 강한 우려가 든다”면서도 이기영에게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형제도는 인간의 생명 자체를 영원히 박탈하는 냉엄한 형벌로써 문명국가가 상정할 수 있는 극히 예외적 형벌”이라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을 사회에서 무기한 격리시키는 ‘무기징역형’만으로는 형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거나, 피고인에게 반드시 ‘사형’을 선고해야만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누구도 단정하기 어렵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다만, 이기영에 대한 우려의 시선은 거두지 못했다. 재판부는 “이기영은 피해자들을 살해한 뒤 사체를 유기하고도 일상을 사는 등 인면수심의 잔혹성을 보였다”며 “법이 허용했더라면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형’을 선택해 피고인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방안을 고려했을 수 있을 만큼 대단히 중하고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강조했다.
형법 72조에 따르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피의자는 가석방 기회가 있다. 가석방이 불가능해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 사형과 달리, 무기징역은 형기 20년을 채우면 개전의 정(잘못을 뉘우침)이 현저할 때 가석방 신청이 가능하도록 돼 있다.
이정석 법무법인 영진 변호사는 “재범 우려가 높은 잔인한 범죄자를 사회로 복귀시키는 것은 다른 범죄로도 이어질 수 있어 우려된다”며 “외국의 사례처럼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형을 입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