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를 덮친 전례 없는 폭염이 러시아의 전쟁 자금을 말리기 위한 국제사회의 에너지 제재에 균열을 내고 있다.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산 원유 수입금지를 비롯한 강도 높은 조치를 2년째 취하고 있지만, 전력 수급에 비상이 걸린 아시아 국가들이 러시아산 화석연료 수입을 늘리면서 제재 효과가 반감될 것이란 우려가 커졌다.
21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은 에너지 정보업체 케플러를 인용해 아시아 국가들이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높이고 있다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아시아 폭염의 수혜자가 됐다”고 전했다.
지난달 러시아산 석탄의 아시아 국가 수출량은 746만 톤으로, 지난해 4월(563만 톤)보다 32% 늘었다. 전체 석탄 수출량 중 3분의 2는 중국과 인도로 향했다. 지난달부터 섭씨 40도를 웃도는 괴물 폭염에 신음하는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국가들 역시 러시아산 석탄을 사들이고 있다. 지난달 아시아 지역에 대한 러시아산 중유 수출량도 하루 평균 80만4,300배럴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액화천연가스(LNG)의 지난달 수출량 역시 올해 들어 최대치를 찍었다.
이는 때 이른 폭염 때문이다.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는 통상 5월에, 동아시아는 7월 이후에 본격적인 여름 더위가 닥친다. 올해는 이상 기후 탓에 폭염 시작 시기가 빨라지면서 각국에서 전력 소비가 폭증했다.
이달 들어 기온이 섭씨 45도를 넘어선 태국에선 이달 6일 전기 사용량이 3만9,000메가와트(㎿)로 지난해 같은 날 대비 7,000㎿ 늘었고, 인도 동부와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에서도 전력 사용량 폭증으로 수시로 정전이 발생하고 있다. 중국 국가에너지국은 올해 최대전력(하루 중 전력 사용량이 가장 많은 순간의 전력 수요)의 고점이 지난해보다 5.4% 증가한 13억6,000만 킬로와트(㎾)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의 최대전력 고점은 2021년 11억9,000만 ㎾, 2022년 12억9,000만 ㎾로 계속 상승했는데, 올해 또 기록을 깰 것이란 얘기다. 중국 남부 지역에선 전력 수급에 차질을 빚을 것으로 관측됐다.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에 각종 제재 철퇴를 가하고 있지만, 전력난이 코앞에 닥친 아시아 국가들이 어쩔 수 없이 러시아의 손을 잡고 연료 비축에 나선 셈이다.
싱가포르 에너지 정보제공업체 JTD에너지서비스의 존 드리스콜 수석 전략가는 “자기 문제를 해결할 여력이 없는 나라들이 국제 문제(러시아 제재)까지 신경 쓰기는 쉽지 않다”며 “특히 빈곤한 나라일수록 에너지 확보가 시급해 미국과의 충돌 위험을 감수하고 러시아산 에너지를 구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재 여파로 러시아산 에너지 가격이 떨어진 것도 아시아 국가들이 러시아에 눈을 돌리는 이유다.
블룸버그통신은 “‘슈퍼 엘니뇨’의 영향으로 올해 하반기까지 무더위가 지속될 것으로 관측되는 만큼 러시아산 에너지를 계속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