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린 콜로나 프랑스 외교장관이 지난달 한국을 찾았습니다. 박진 외교장관과 전략대화를 위해서였지요. 이제 맞춰 프랑스 호위함 프레리알함도 마치 지원사격하듯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한국과 9,000㎞ 떨어진 프랑스에서 군함을 보냈으니 대단한 정성입니다.
프레리알함은 필리핀∙태국과 '법치 중심의 인도·태평양'을 수호하기 위한 훈련을 마친 뒤 대만해협을 가로질러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콜로나 장관은 박 장관과 회담에서 우리 정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자유·평화·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면서 긴밀한 협력을 강조하며 프레리알함 선상에 올랐지요.
프랑스 함정의 한반도 진입과 대만해협, 거기에 인도·태평양까지. 죄다 중국이 꺼려하는 것들입니다. 무언가 강렬한 복선이 깔려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죠.
콜로나 장관은 특히 우리 측에 "공동의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언급한 '공동의 프로젝트'가 궁금해졌습니다. 취재 결과, 프랑스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에서의 공동개발 협력과 남태평양 일대 기후변화 대응 및 공동해양 연구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언뜻 평화롭고 온순한, 약간은 밋밋한 내용으로 비칩니다. 그럼에도 콜로나 장관이 굳이 선상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한국을 찾아 파트너십을 제안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프랑스는 스스로를 인도·태평양 국가로 여긴다고 합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입니다. 프랑스는 인도양이나 태평양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최근 파리에서 만난 프랑스 정부 관계자의 설명은 달랐습니다. 그는 한국을 비롯해 인도·호주·일본 등 인도·태평양지역 기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프랑스의 배타적경제수역(EEZ)은 93%가 인도양과 태평양에 있고 △총 150만 명의 인구가 인도·태평양 내 프랑스령에 거주하고 △해당 지역에 8,000여 명의 프랑스군이 주둔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프랑스를 '인·태국가'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실제 프랑스는 2018년 인도·태평양 국가로 자칭하면서 '법과 자유에 기반한 안정적인 다극질서'를 추구하겠다는 전략보고서를 발표합니다. 국제경제 패권이 인도·태평양 권역으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발언권과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죠.
효과는 있었을까요. 일단 프랑스는 공격적인 인·태사업을 통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발언권'을 가진 나라가 됐습니다. 최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중국을 전격 방문해 미국을 비롯한 서구가 경악한 이유입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가 인도·태평양의 방관자가 아니라 '적극 행위자'라며 "유럽은 다른 강대국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마크롱 대통령 발언의 배경을 살펴봤습니다. 프랑스 외교부 관계자는 "프랑스가 추구하는 인·태전략 목표는 대만해협의 현상유지와 법 중심의 인도·태평양 질서 유지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안보동맹국들과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외교∙경제적으로 다자협력체제를 다양하게 구축해 미중 패권국의 갈등으로 격화되는 디커플링(탈동조화)과 자유무역 질서의 교란을 최대한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프랑스의 '소명의식'인 듯한 뉘앙스입니다.
반대로, 프랑스는 국제경제 질서의 변화를 저지할 '힘'을 갖췄을까요. 그래서 프랑스는 유럽연합(EU)의 단결을 강조합니다. 프랑스 홀로 목소리를 내는 것과 EU의 묵직함으로 촉구하는 것은 무게감이 다르니까요.
실제 프랑스와 EU는 미국의 인플레감축법(IRA)과 반도체법에 적극 대응하고 있습니다. IRA가 통과되자 EU는 핵심원자재법(CRMA)으로 맞불을 놨습니다. 프랑스 외교부 관계자는 "EU 내 공급망의 안전성을 높이고, 직면한 과제를 협력적으로 풀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중국과 개발도상국이 '녹색제국주의'라고 비판하는 EU의 '탄소국경조정메커니즘'(CBAM)에 대해서도 "일부 지역만 탄소배출이 줄고, 다른 나라에 탄소배출이 집중되거나 '수출'되는 악순환을 막기 위해 구체화한 메커니즘"이라며 "기후변화는 전 세계가 당면한 시급한 과제다. 경제 논리에 따라 특정 지역이나 국가에 탄소배출이 집중되는 것을 막을 새로운 논리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국가들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힘은 EU라는 거대 다자협력체제에서 발산하고 있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이 대만 문제와 관련해 주어로 '프랑스'가 아닌 '유럽'을 언급한 이유지요. 독박을 피하고 서로 맞드는 다자외교의 파괴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인도·태평양은 만만치 않은 곳입니다. 프랑스가 인도·태평양 국가임을 강조하며 영향력을 키우고 있지만 지리적으로 거리가 상당합니다. 미국과 중국, 일본에 비하면 불리한 여건이죠.
그래서 프랑스는 다시 '다자주의'를 꺼내 듭니다. 먼저 인도·태평양에 이미 확보한 해외 영토를 기반으로 남태평양 국가들과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데 역량을 쏟아부었습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와 마요트, 누벨칼레도니아, 레위니옹, 왈리스푸투나 등 5개 지역을 대표해 남태평양국각료회의(SPDDM)와 아시아태평양정보국회의(APICC)를 주도하고, 남태평양국의 최대 현안이라 할 수 있는 기후변화 문제를 국제기구에 띄웠죠.
특히 남태평양 권역은 미국과 중국이 서로 상대방의 군사기지를 설치하지 못하도록 치열하게 경쟁하는 곳입니다. 패권 경쟁의 또 다른 최전선이나 마찬가지죠. 프랑스는 이곳에서 '영토 보유국'의 강점을 무기 삼아 목소리를 높이며 기후변화 대응을 명분으로 입지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는 갈등이 첨예한 남중국해와 대한해협 일대에서 미국, 호주, 일본 해군과 상호 운용성을 높이는 훈련에 나서고 인도, 필리핀과는 '항해의 자유' 순시를 조율했습니다. 이처럼 인도·태평양 해역에서 프랑스의 군사행동은 중국을 압박하는 카드이기도 합니다. 만약 남중국해 일대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중국은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그리고 이에 더해 프랑스가 동참해 맞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약점이 많습니다. 당장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를 억제하는 데 적잖은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죠. 기치를 내건 개발협력은 아프리카와 지중해지역 투자에 집중돼 있습니다. 아세안 국가들과 공조한다지만, 문화적·지리적 밀접도가 일본이나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떨어져 협력의 수준을 높이기 쉽지 않죠. 남태평양에서 막대한 물량공세로 파죽지세인 중국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프랑스는 인도·태평양에서 기회와 한계를 동시에 절감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향해 적극적으로 인·태전략 협력을 제안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일단 시작은 해외 원조사업입니다. 프랑스는 한국의 농촌·지역개발 사업과 프랑스의 교육 원조사업에 접점이 많다는 판단입니다. 이를 발판으로 한국과 프랑스가 아세안에서 외교적 지렛대를 확보해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는 기대가 큽니다.
남태평양 권역도 마찬가지죠. 현재 미국, 중국, 일본은 남태평양을 상대로 이미 많은 원조·군사협력 사업을 벌인 상태입니다. 남태평양 일대 프랑스의 경쟁력은 기후변화와 해양생태계에 있죠. 이 영향력을 강화하려면 '우군 만들기'가 필요합니다. 프랑스의 해상연구소 관계자는 "한국과 프랑스가 심해 환경과 생태독성학과 관련해 협력할 지점도 많다"면서 남태평양 해양공동연구를 통해 한국과 프랑스가 해양광물자원에서부터 기후변화 대응까지 다양하게 협력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프랑스의 제안에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정부는 아직 고심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미국이나 중국만 바라보고 있는 사이 어느새 가까이 파고든 프랑스와 인도·태평양지역에서 우리의 국익을 얼마나 극대화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