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4일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재의요구권을 발동하면서 취임 후 처음으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2016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국회법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후 약 7년 만이었다. 윤 대통령은 “양곡관리법안은 시장의 쌀 소비량과 관계없이 남는 쌀을 정부가 막대한 혈세를 들여 모두 사들여야 하는 ‘남는 쌀 강제매수법’”이라고 야당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역대 대통령은 총 66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 중 45건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었다.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이 최초로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도 ‘양곡매입법안’이었다. 여당이 원내과반 다수당일 때는 거부권이 필요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이 행사한 3건이 그렇다. ‘대중교통육성 및 이용촉진법률 개정안’은 택시를 대중교통에 포함시켜 정부지원을 받도록 했지만, 이 대통령은 전형적인 포퓰리즘 입법으로 규정해 거부했다.
□ 우리 헌법은 거부권행사 기준을 ‘이의가 있을 때’라고만 정의해 대통령 재량에 맡기고 있다. 입법부 횡포에 행정부의 자기방어 수단이자 ‘경솔한 악법’이 제정되는 사태를 막는 안전장치의 측면이 있다. 거부권이 행사된 법률안을 국회가 다시 통과시키려면 훨씬 까다로운 ‘재적 과반 출석 및 출석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어야 해 불가능에 가깝다. 1988년 민주화 이후 국회의 재의결이 성공한 경우는 1건에 불과했다.
□ 미국에선 거부권을 행사하는 사례가 감소하는 반면, 거부권이 의회에서 무효화되는 비율은 높아지고 있다. 윤 정부 출범 이후 거대야당이 ‘포퓰리즘 법안’이란 비판 속에 밀어붙이고, 대통령이 최종 방어하는 ‘거부권 정국’이 일상화할 조짐이다. 윤 대통령이 간호법 제정안에 두 번째 거부권을 행사할지 주목되는 이유다. 거부권이 등장할수록 국가 최고지도자로서 대통령의 국정 조정능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국민화합형 리더가 사라지는 시대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면대치하며 자기 지지층만 챙기고 1표라도 앞서면 그만이란 생각이 지배한다. 갈등조정이나 국민통합이란 좀 더 상위의, 정치 본연의 기능을 포기한 지 오래된 듯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