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화면에 전혀 다른 장르와 내용의 영상 서너 개가 동시에 재생된다. 이걸 누가 볼까 싶지만 보다 보면 계속 보게 되는 영상. 숏폼(짧은 동영상) 콘텐츠 플랫폼 '틱톡'을 이용하다가 이런 영상을 본 적이 있다면 당신도 이미 '슬러지(Sludge·진창) 콘텐츠' 알고리즘의 타깃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이른바 슬러지 콘텐츠로 불리는 화면 분할 영상이 최근 틱톡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화면 분할 영상은 올해 초만 해도 이름조차 없었지만, 조회 수 수백만 회를 기록한 콘텐츠들이 늘면서 업계에선 슬러지 콘텐츠라는 이름을 붙였다.
슬러지 콘텐츠는 동시 재생되는 영상들 간에 상관관계가 전혀 없다는 게 특징이다. 이를테면 화면을 세 개로 나눠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 △드라마 장면 일부 △정치 뉴스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식이다. 잠깐만 봐도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들지만, 슬러지 콘텐츠는 미국 Z세대(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걸쳐 태어난 세대)를 중심으로 유행처럼 번지는 중이다. 숏폼 등장 이후 핵심만 압축한 1분 내외 영상에 익숙해진 데 이어, 이제는 아예 여러 영상을 동시에 틀고 보는 시청 방식이 떠오르는 것이다.
슬러지 콘텐츠가 증가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틱톡이 불러온 '숏폼 중독'의 여파라는 해석이 가장 많다. '짧고 매운' 영상에 중독되다 보니 주의력이 떨어지고 더 자극적인 영상을 찾게 됐다는 것이다. 틱톡에서 슬러지 콘텐츠 치면 연관 검색어로 '슬러지 콘텐츠 주의력 결핍 과다행동 장애(ADHD)'가 가장 먼저 뜰 정도다. 미 NBC는 "누군가에겐 슬러지 콘텐츠가 골칫거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숏폼 마니아들에게는 슬러지 콘텐츠처럼 큰 자극을 주는 영상이 위안이 된다"고 했다.
여기에 인기 콘텐츠를 만들려는 콘텐츠 창작자들의 욕구도 슬러지 콘텐츠 확산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 슬러지 콘텐츠는 콘텐츠 속 하나의 영상에 흥미가 없으면 다른 영상에 눈을 돌리면 돼 콘텐츠 시청 시간이 길어진다. 이용자들을 더 오래 잡아둘 수 있다는 뜻이다. 저작권 이슈를 피하기 위한 꼼수로 슬러지 콘텐츠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여러 영상을 짜깁기한 탓에 저작권 위반 콘텐츠를 걸러내는 알고리즘을 속이기 쉽다.
그러나 슬러지 콘텐츠의 유행은 멀티태스킹(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것)에 능한 Z세대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일 뿐 확대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반론도 있다. 영화를 보면서 스마트폰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젊은 세대에겐 여러 영상을 동시 시청하는 것 역시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란 것이다.
통상 틱톡의 영상 추천 알고리즘이 '인기 있는 콘텐츠'를 우선 노출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더 많은 이용자들이 슬러지 콘텐츠를 보게 될 가능성이 있다. 호불호와 관계없이 나도 모르게 빠져들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테크업계에선 슬러지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꽤나 길게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