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오프(PO) 시작하면서 눈이 돌았던 것 같아요.”
프로농구 고양 캐롯의 이정현은 뜨거웠던 ‘봄 농구’를 이렇게 돌아봤다. 비록 챔피언결정전 문턱에서 안양 KGC인삼공사에 시리즈 전적 1-3으로 패하며 시즌을 마무리했지만, 2년 차 가드 이정현은 PO 내내 신들린 듯한 활약으로 동명이인 선배 이정현(서울 삼성)의 뒤를 이을 스타 탄생을 알렸다. 이정현은 21일 한국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전)성현이 형이 (달팽이관 이상으로) 제대로 뛸 수 없는 상황에서 PO를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그냥 3패로 떨어지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다”며 “여기에 (김승기) 감독님이 정규리그 때부터 강조해온 승부욕이 더해지면서 힘든 줄도 모르고 경기를 뛰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이정현은 PO 내내 강철체력을 자랑했다. 정규리그에서 전체 선수 중 가장 많은 출전시간(34분 2초)을 기록하고도 6강 PO에서 평균 36분 46초(팀 1위), 4강 PO에서 31분 43초(팀 2위)를 뛰었다. 많이 뛰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는 6강 PO에서 평균 24점(팀 2위)을 올렸다. 칭찬에 인색한 김승기 감독이 “정현이가 팀을 4강으로 끌고 갔다”고 극찬했을 정도다.
그가 폭풍 성장한 배경에는 김 감독의 혹독한 ‘길들이기’가 있었다. 이정현은 “감독님한테 시즌 내내 정말 많이 혼났다”며 “주눅도 많이 들었고, 어떤 때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릴까’라는 생각도 들었다”며 웃었다.
김 감독의 가르침은 결국 그를 ‘유망주’에서 ‘톱클래스 가드’로 성장시켰다. 이정현은 “예를 들어 예전에는 돌파를 하면서 상대 선수와 붙는 걸 좋아했는데, 감독님은 멈춰 서서 파울을 유도하거나 공을 밖으로 빼서 어시스트를 주라는 요구를 했다”며 “실제 경기에 적용해보니 선택지가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새로운 플레이에 눈을 뜬 이정현은 말 그대로 매 경기 성장했다. 그는 정규리그에서 15점(팀 3위)에 4.2 어시스트(팀 1위)로 전성현과 함께 ‘토종 원투펀치’를 이루며 단단한 플레이를 펼쳤다. 그는 “대학시절 '2년 차 징크스'를 겪었던 경험이 있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며 “마침 감독님과 코칭스태프가 많은 출전시간을 보장해줘, 감사한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올 시즌 처음으로 포인트가드 역할을 맡으며 프로 무대에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리딩 능력이나 필드골 성공률을 더 끌어올리면 메인 볼 핸들러로서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며 “팀 우승과 대표팀 승선도 욕심이 난다”고 말했다.
올 시즌 선전한 캐롯이지만 향후 구단의 운명은 불투명하다. 모기업의 재정악화로 매각 협상이 진행 중이고, 연고지 이적설까지 돌고 있다. 그러나 이정현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게 고양팬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평생 가져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올 시즌 홈팬들이 보내준 전폭적인 응원에 큰 감동을 받았다”며 “고양체육관은 내가 프로 데뷔를 한 무대다. 평생 잊지 않을 것”이라고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