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라는 이름을 가진 봄꽃 나무들

입력
2023.04.23 12:00
25면

편집자주

우리나라에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약 4천 종의 식물이 자랍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 풀, 꽃, 나무 이름들에 얽힌 사연과 기록, 연구사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엮을 계획입니다.

봄이 완연해진 이맘때면 보리가 패어서 여물기 시작한다. 요즘 세대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엔 굶는 사람이 많았다. 흉년으로 가을걷이가 적을 경우 굶주림의 겨울을 버텨야 했고, 다음 해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근의 기록들은 참담하다. 조선 개국 이후 약 500년 동안 기근이 기록된 해가 약 330년이나 된다. 특히 1695년부터 4년간 '을병대기근'으로 당시 조선 인구의 20%가 굶고 병들어 죽었다.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인상식(人相食)'의 참상은 상상하기도 괴롭다.

봄이 되어 새로 돋은 나무와 풀의 어린순은 물로 데치고 우려내어 나물로 많이 먹었고, 고로쇠나 자작나무 수액도 연명을 위한 먹거리였을 것이다. 뭐든 먹고 살아남으라며 풀뿌리와 나무껍질 먹는 방법을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나라에서 만들어 배포한 '구황촬요(救荒撮要·1554)'의 내용은 그래서 슬프다. 어찌어찌 봄까지 살아남았다 해도 활동이 많은 초여름을 넘기는 일은 생사의 고비였으리라. 보리가 익어가는 이 시기를 '보릿고개'라 불렀던 연유이다. 숱한 호란과 왜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근래까지 우리 삶에서 행복의 기준은 배부르고 등 따스한 것이었다.

4월이 되면 우리나라 전국 산기슭과 들녘 어디에서나 무리 지어 하얗게 피는 꽃을 볼 수 있다. 조팝나무다. 키 작은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서 피는 꽃 모양이 마치 좁쌀로 지은 밥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최근까지 여러 기록과 식물도감에 조밥나무라는 이름을 함께 썼지만 정식 이름은 조팝나무다. '조팝'은 조선어학회에서 펴낸 '조선어표준말모음(1936)'에 '조밥'의 방언으로 기록하고 있고, 북한에서도 조팝나무라 부르며 이름의 유래를 공유하고 있는 꽃이기도 하다.

5월이 되면 쌀로 지은 이밥에서 유래한 이름의 이팝나무 꽃도 핀다. 요즘 전국에 가로수나 정원수로 많이 심고 있어 제법 알려진 꽃나무로 뽀얀 쌀밥이 연상되는 흰 꽃이 초여름까지 핀다. '조선거수노수명목지(1919)'에 '백반목(白飯木)'으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식물향명집(1937)'에는 이팝나무로 기록되어 있다. 이팝나무 역시 북한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보릿고개와 때를 맞춰 꽃이 피는 이 식물에 이팝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여러 가지 설들이 분분하다. 조선시대 고단함과 배고픔을 겪었던 민초들의 지배계층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반영된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기름기가 흐르는 흰쌀밥은 벼슬을 해야 이씨 성을 가진 임금 덕에 먹을 수 있는 밥이라 하여 '이밥'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긍할 만하다.

요즘 자주색으로 꽃이 피는 박태기나무의 이름에도 밥에서 유래한 말이 들어 있다. 둥그스름한 작은 꽃이 수북이 가지에 붙어서 피는 모양이 밥풀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방명으로 밥태기나무, 밥태기꽃, 밥풀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밥태기는 밥풀의 전라도 방언이다. '조선식물향명집'에는 박태기나무로 기록되어 있다. 북한에서는 구슬꽃나무라 부른다.

우리나라는 작년부터 1인당 육류소비가 쌀 소비량을 넘었고, 쌀 생산량은 꽤 오래전부터 수요를 초과하고 있다. 굶어서 죽는 일은 없다지만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여전히 50%에 못 미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작년 세계 기아 인구가 8억2,800만 명으로 코로나 이후 1억5,000만 명이 더 늘었다고 한다. 기후변화, 국제분쟁 등 식량수급을 위협하는 상황이 상시화된 요즘이다. 비록 과거에 붙여진 꽃 이름이지만 먹는 것과 관련된 그 유래에 대해 다시 새겨봄 직하다.

※ 식물 이름의 지방명은 '조선식물향명집' 주해서인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2021)'에서 인용

서효원 식물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