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9월 30일 서울 명동 코리아극장. 마이클 더글러스가 주연한 외화 ‘위험한 정사’를 상영하던 극장에 누군가 뱀들을 풀었다. 이튿날에는 신촌 신영극장 여자 화장실에서 뱀 열 마리가 발견됐다. '위험한 정사'는 외국 영화사들이 한국 영화사를 거치지 않고 국내 극장들에 직접 배급한 첫 영화였다. ‘직배’가 확산하면 한국 영화산업을 외국 자본에 빼앗길 것이라고 우려한 일부 영화인들이 실력 행사를 시도한 것. 당시에는 누구도 한국 영화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쓰는 날이 올 것이라 상상조차 못 했을 터이다.
돌아보면 우스꽝스러운 ‘뱀 소동’은 한국 문화산업이 새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문화산업 연구자 김윤지씨는 신간 ‘한류 외전’에서 바로 이 시기를 전후해 한국에서 문화를 산업으로 보는 개념이 싹텄다고 설명한다. 세계 각국이 시장을 개방하는 과정에서 한국 영화시장도 문을 연 것. 충격은 점차 음악과 드라마 등 다른 문화산업으로 번져 나갔다. 국내 영화 제작사, 기획사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점차 가내수공업 수준을 벗어나 기업다운 기업으로 성장해 나갔다.
K팝부터 K드라마, K무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로 구성된 ‘K문화산업’의 성장을 한두 요인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게 작가의 시각이다. 9가지 장면을 중심으로 지난 30여 년간의 문화산업 성장사를 풀어 나간다. 개별 상품의 성공 요인보다 우수한 상품을 꾸준히 내놓을 수 있는 역량이 어떻게 축적됐는지를 분석하는 게 특징. 예컨대 K팝 아이돌은 ‘공장 상품’ 같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런 비판 속에서 K팝은 천편일률적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진화해 나갔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