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인형 같았습니다."
1957년 2월 2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 필라델피아에서 '상자 속 소년'을 처음 본 순간을 현지 경찰관 앨머 팔머는 이렇게 떠올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그날, 아기용 요람을 넣어 팔던 골판지 상자 속에서 발견된 건 '인형'이 아니었다. 벌거벗은 채 담요에 싸인 '어린이 시신'이었다.
키 102㎝에 몸무게 13㎏. 아이의 작은 몸에는 학대의 흔적이 선명했다.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은 깔끔히 정리돼 있었으나, 온몸에는 생긴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멍 자국이 가득했다. 숨지기 직전 구토한 듯 체액 자국이 남아 있었고, 손가락은 물속에 오래 있었을 때처럼 쭈글쭈글했다.
부검 결과, 사인은 역시나 구타와 영양실조였다. 당시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법의학자 빌 배스는 훗날 '필라델피아 시티 페이퍼'와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계속 궁금했다"며 "50여 년의 경력 동안 2,500건 이상 사건을 봤지만 이 소년을 떠올리는 건 여전히 힘들다"고 토로했다. 기억하는 것조차 섬뜩할 정도의 아동 학대 사건이었다는 얘기다.
수사 초기만 해도 경찰은 곧 사건이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가장 비극적인 미제 사건으로 남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소년의 얼굴 사진이 신문에 실렸고, 지역 상점에 내걸렸다. 공과금 청구서와 함께 필라델피아 전 가구에도 배포됐다. 심지어 경찰은 시신에 옷을 입혀 앉힌 다음 사진을 찍어 뿌리기까지 했다. 누군가 이 소년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소년을 안다는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대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65년간 이름 없는 피해자, '상자 속 소년'으로만 남았다.
사건 해결을 위한 노력이 부족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단서가 너무 없었다. 당시 추운 날씨는 시신의 부패 속도를 늦췄다. 소년이 죽은 지 얼마나 됐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시신을 처음 발견한 필라델피아 라살대학교의 한 학생(27)은 이 사실을 신부에게 먼저 털어놓았고, 하루가 지나서야 경찰에 신고했다. 현장에서 찾은 물품도 큰 의미가 없었다. 경찰은 시신 근처에서 발견된 감청색 코듀로이 모자의 판매처를 수소문했다. 이 모자를 팔았던 상점 주인은 "혼자 온 20대 남성이 사 갔다"고 기억했으나, 그것만으로 구매자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경찰은 골판지 상자에도 주목했다. 백화점 체인 JC페니에서 판매하는 아기용 요람 상자였다. 1956년 12월 3일부터 1957년 2월 16일까지 판매된 요람 12개의 구매자를 추적했다. 현금 결제만 하던 때였음을 고려하면 꽤 유의미한 단서가 될 만했다. 하지만 역시 소년과의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 지역 보육원과 병원에서도 아무런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여럿이 경찰의 용의선상에 오르긴 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 여파로 대거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들도 그중 하나였다. 경찰은 헝가리 난민에 관한 신문 기사에서 '상자 속 소년'과 비슷한 인상착의의 소년 사진을 발견했다. 이민국과 함께 1만1,000장이 넘는 여권 사진을 샅샅이 뒤져 기사 사진 속 소년을 찾아냈다. 이 가족을 추적해 노스캐롤라이나까지 갔으나 헛수고였다. 경찰을 맞이한 건 평화롭게 집 앞 정원에서 놀고 있던 사진 속 소년이었다.
미 전역을 떠돌던 축제업체 노동자 더들리 부부도 한동안 경찰의 수사망 안에 있었다. 1961년 이들 부부의 7세 딸이 방임과 영양실조로 사망한 탓이다. 부부는 딸의 시신을 묘지에 매장하는 대신, 담요에 싸서 버지니아의 우거진 숲에 묻었다. 이후 더들리 부부의 자녀 10명 중 7명이 굶어 죽었고, 그중 누구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장례가 치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 경찰은 이 중 한 명이 '상자 속 소년'일 수 있다고 의심했지만, 수사는 소득 없이 종결됐다.
급기야 희생된 소년이 실제로는 여자아이로 길러졌다는, 다소 신빙성이 떨어지는 가설마저 제기됐다. 법의학자 프랭크 벤더는 "급하게 잘린 듯 보이는 시신의 머리카락, 일부러 뽑은 것 같은 눈썹이 그 증거"라며 "여아로 양육됐기 때문에 이 소년을 안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벤더는 여자아이 모습을 한 '상자 속 소년'의 얼굴 스케치를 직접 내놓기도 했다. 이 가설은 1950년대 말 잠시 검토됐다가 사실상 폐기됐다.
경찰은 다른 유괴 사건의 피해자일 가능성도 따져 봤다. 특히 1955년 롱아일랜드 외곽 슈퍼마켓에서 납치된 세 살배기 스티븐 크레이그 댐맨과의 연관성을 수사했으나, '상자 속 소년'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이가 이 사건에 매달렸다. 소년을 검시했던 레밍턴 브리스토는 평생 단서를 쫓았다. 전국을 쏘다니는 데 수천 달러를 썼다. 그 역시 어린 아들을 잃은 아버지였다. 서류 가방에는 늘 '상자 속 소년'의 얼굴을 석고로 뜬 데드 마스크가 있었다.
사실 브리스토는 199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위탁가정을 운영하던 한 가족을 강하게 의심했다. 계기는 좀 생뚱맞다. 1960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뉴저지의 심령술사 플로렌스 스터필드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스터필드는 "위탁가정을 찾아보라"고 귀띔했다. 마침 시신 발견 장소와 불과 1마일 남짓 떨어진 곳에 위탁가정이 있었다.
아서와 캐서린 부부는 딸 안나 마리와 함께 살면서 5~20명 아동을 위탁받아 돌봤다. 결혼을 하지 않았던 안나 마리는 당시 20세 나이에 이미 4명의 아이를 낳았고, 이 중 한 명은 1955년 놀이공원에서 감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캐서린이 죽은 후 아서가 의붓딸인 안나 마리와 결혼하면서 의혹은 더 커졌다. 이웃들은 '상자 속 소년'이 아서와 안나 마리의 숨겨진 자식일지 모른다고 수군댔다. 브리스토 역시 안나 마리가 소년의 엄마라고 믿었지만, 정황 증거 이상을 찾아내지 못했다.
다시 미궁으로 빠진 사건은 2002년 자신을 'M'이라고 밝힌 한 여성의 등장으로 새 국면을 맞았다. M은 필라델피아 로워메리언의 교사였던 자신의 모친이 소년을 죽였다고 증언했다. 1954년 돈을 주고 소년을 사 온 뒤, 2년여간 신체적·성적 학대를 일삼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소년이 구운 콩을 먹고 토하자 욕조 안에 던져 넣고,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때렸다고 했다. 당시 13세였던 M은 "어머니가 시신을 숲까지 운반하는 것을 도왔다"고 말했다. 그럴듯해 보였다. 당시 필라델피아 형사 윌리엄 H. 켈리는 "M은 박사학위를 가졌고, 좋은 직장에 다녔다. 미친 사람 같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M은 정신질환 전력이 있었고, 세부 사항을 모두 털어놓지 못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M의 이웃들은 "어린 소년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M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었다. 미 연방수사국(FBI) 출신 사설 탐정이자, 미제 사건을 파헤치는 '비도크 소사이어티' 회장인 윌리엄 플라이셔는 "M의 말 중에서 입증된 건 없다"고 밝혔다.
'상자 속 소년'은 1957년 7월쯤 한 도예가의 밭에 '미국의 미확인 아이'라는 묘비명과 함께 잠들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잊혀지는 듯했지만, 1998년 10월 미국의 유명한 범죄 추적 TV 프로그램 '아메리카 모스트 원티드'에서 이 사건이 다뤄지며 수사도 다시 급물살을 탔다. 유전자정보(DNA) 수집을 위해 유골이 다시 발굴됐고, 필라델피아 아이비힐 묘지에 재매장됐다. 소년을 애도하는 발걸음은 지금도 이어진다. 생면부지의 시민들이 이곳을 찾아 꽃과 장난감을 두고 간다. 비도크 소사이어티 회원들은 매년 추모식을 열고 있다.
이런 염원이 모여 지난해 12월, 소년은 드디어 제 이름을 찾았다. 사망 당시 4세였던 '조셉 아우구스투스 자렐리'. 경찰은 유전자 계보 분석을 통해 그의 부모는 모두 세상을 떠났으나, 형제자매가 필라델피아 서부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제이슨 스미스 필라델피아 경찰국 경감은 "소년을 죽인 범인과 구체적인 사망 경위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최선을 다해 계속 수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살아 있었다면 칠순 노인이 됐을 '조셉'은 언제쯤 안식을 맞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