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학원가를 공포에 떨게 한 ‘마약 음료’ 사건의 퍼즐이 점차 맞춰지고 있다. 경찰은 한국 국적 20대 남성에 이어 중국 현지에 있는 중국동포 30대 남성의 신원을 특정했다. 이들은 범행의 큰 그림을 그린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조직의 일원으로 추정돼 이번 사건이 마약과 전화사기를 결합한 신종 범죄 정황임이 뚜렷해졌다.
10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는 앞서 7일 체포된 길모씨에게 마약 음료 제조를 지시하고 빈 병 등을 중국에서 보낸 한국 국적 이모씨와 현지에서 범행에 가담한 중국동포 박모씨의 소재 파악에 나섰다. 두 사람은 현재 드러난 마약 음료 사건의 가장 ‘윗선’이다. 경찰은 이들의 체포영장을 신청하고 이씨의 여권을 무효화했다. 중국 공안과도 공조 수사에 나설 방침이다.
길씨가 마약 음료를 제조할 때 쓰인 필로폰을 ‘던지기’(약속된 장소에 마약을 숨기면 구매자가 찾아가는 것) 수법으로 판매한 중국동포 박모(35)씨도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이미 다른 마약 사건으로 경기 수원중부경찰서에 검거된 상태였다. 박씨는 혐의를 대부분 인정했지만, 중국에 있는 또 다른 중국동포(32)의 지시를 받고 마약을 판매만 했을 뿐, 보이스피싱 조직과는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금까지 체포된 이들의 면면과 혐의를 보면 범죄 시나리오를 짜고, 세부 역할을 배당한 지휘부는 중국에 근거지를 둔 보이스피싱 조직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 이씨는 국내에서 전화사기 범죄에 가담한 전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 학부모 협박 전화에 사용된 전화번호를 중계기로 변작(070→010 변경)해 검거된 김모씨도 의뢰를 받고 번호를 바꿔주는 전문업자였다. 그의 자택에서는 노트북 6대, 이동식저장장치(USB) 모뎀 97개, 유심 368개가 압수됐다. 해당 모뎀에서 사용된 일부 번호에선 총 14건의 보이스피싱 발생 신고가 있었고, 피해 금액만 1억여 원이었다.
길씨가 제조한 마약 음료를 건네받아 강남구청역과 대치역 인근에서 나눠준 아르바이트생 4명 중 1명도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었다. 경찰은 나머지 3명은 구인구직 사이트를 보고 합류한 단순 가담자로 결론 내렸다.
서울중앙지법은 이날 길씨와 김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민수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고 구속 사유를 밝혔다.
피해자가 더 나올 가능성도 있다. 제조된 음료 100병 가운데 18병이 유포됐는데, 학생과 학부모가 7병을 마셨고 3병은 버린 것으로 조사됐다. 아르바이트생 2명도 마약 음료인 줄 모르고 각각 1병씩 마셨다. 미개봉 상태의 음료 36병을 수거한 경찰은 나머지 44병은 이씨 지시를 받은 아르바이트생들이 폐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8병의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또 시음 행사 후 한 학부모에게 걸려온 협박 전화에서 범인들이 대가로 1억 원을 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청은 이날 서울 1,407개 초ㆍ중ㆍ고와 학부모 83만 명을 대상으로 긴급 스쿨벨 2호를 발령하는 등 청소년 대상 마약범죄 차단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6일 발령한 긴급 스쿨벨 1호에선 마약 음료 식음 금지와 신고를 당부했는데, 2호는 대처 방법 등 보다 구체적 내용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