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개혁: <3> 시험이 바뀌면 한국도 바뀐다
챗GPT 등장 이후 인공지능(AI)이 사회 전반에 파격적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기존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흡수하는 “집어넣는 교육” 패러다임에서, 숙지한 지식을 바탕으로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을 “꺼내는 교육”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시급해졌다.
그간 우리 공교육에 대한 비판은 많았으나 근본적 변화는 없었다. 교육과정이 수차례 개정됐어도 평가 패러다임은 매번 같았다. 지난해 12월 발표된 2022 개정 교육과정에는 미래 변화의 능동적 준비 역량, 자기주도성 및 창의력과 인성을 키우는 개별 맞춤형 교육, 학생의 삶과 연계한 깊이 있는 학습 등이 강조됐다.
그런데 용어만 다를 뿐 이전 교육과정도 목표는 시대 변화에 대비할 수 있을 것처럼 제시됐다. 그럼에도 변화가 없었던 것은, 평가 패러다임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학력고사, 수능, 기말고사 모두 “다음 중 적절한 것은?” 혹은 “다음 중 옳은 것은?”에 대한 답을 보기에서 고르는 선다형 패턴이었다. 이런 시험은 암기력을 측정하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적절한 것”, “옳은 것”을 고르는 패러다임이어서 학생의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을 측정할 수 없다.
개정 교육과정이 목표 역량을 최대한 평가하려면, 국제 바칼로레아(IB)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IB는 1968년 유엔주재원 자녀들이 국적에 상관없이 양질의 교육을 받고 전 세계 어느 대학에서도 인정받도록 개발됐다. 처음에는 영어, 불어, 스페인어로 개발됐고, 2002년 독일어로, 2013년 일본어로, 2019년에 한국어로 번역됐다. 글로벌 역량을 기르지만 교과 소재는 각국의 국가교육과정과 충돌하지 않게 구조화되어 있다. 160개국에서 적용되고 있는데 한국은 2019년 대구교육청과 제주교육청을 시작으로 올해 말 첫 한국어 IB 입시를 치른다. 다른 교육청(서울, 경기, 부산, 전남, 전북, 충남, 경남)에서도 도입을 추진 중이다.
IB가 기르려는 역량은 우리 교육과정 목표와 다르지 않다. 다만 측정하는 시험이 매우 다르다. IB 입시는 수능 같은 외부평가와, 내신 같은 내부평가를 합산해 총점을 매긴다. 외부평가는 교과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관점을 설득력 있게 쓰는 논술이고, 내부평가는 교과 지식을 실생활에서 자신의 관심사와 연결해 탐구보고서를 쓰는 형식이다. 정성평가인데도 채점 공정성을 인정받아 전 세계 명문대에서 공인되고 있다. 각 교육청에서는 IB를 도입하면서 공정한 정성평가가 가능하도록 교원 연수에 노력 중이다. 글로벌 표준으로 공정하게 채점할 수 있는 채점관이 양성되면, 10년 이상 로드맵으로 한국형 바칼로레아(KB) 평가 체제를 개발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해진다.
IB 평가는 기존 논술과 다르다. 필자의 저서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에는 서울대 시험은 선다형이 아니고 리포트나 논술임에도 교수 관점을 그대로 쓸수록 학점이 높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서울대 시험조차 출제자 의도와 채점자 기대를 예측해야 하는 사실상 답이 정해진 객관식의 또 다른 형태였던 것이다.
수능 개혁에서도 무늬만 주관식을 도입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이미 영국에서도 지난해 8월 노동당 출신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자국의 대입 시험을 당장 폐지하고 IB를 벤치마킹해 새로운 브리티시 바칼로레아 체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기존 영국 입시가 논술이라도 채점 기준이 지식 콘텐츠 중심이라, 역량을 더 평가하는 IB를 참고하라는 것이다. 보수당 출신의 존 메이저 총리도 지지 서명을 했다. 지난달 28일 일본 문부과학성도 'IB 보급 촉진 검토를 위한 전문가 회의 총정리' 보고서에서 IB 교육 효과나 모범 사례를 일반 학교에 파급시켜 초중고 교육발전에 이바지함과 동시에 IB 도입 촉진으로 연결하자고 제언했다.
기초학력은 객관식 평가로도 유용하지만, 상위권 변별은 그런 방식으로는 어렵다. 킬러 문항 정답 찾기가 아닌 IB 논술과 탐구보고서에서 변별이 이루어진다면 교수법, 학습법 모두 바뀔 수밖에 없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되는 2028 대입 정책이 내년 2월 발표된다. IB 시범 도입을 기반으로 수능과 내신 평가 패러다임을 선진화하는 KB 체제 구축 로드맵이 포함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