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아파트 경비원 해고, 입주민들이 막았다…490가구 서명 동참

입력
2023.03.29 17:40
"주민 80% 싫어한다"고 했는데 
760가구 중 490가구가 서명 동참
"주민들 덕분에 살아 있다" 감사 전해

관리사무소로부터 갑작스럽게 계약 만료 통보를 받았던 대구 달서구 한 아파트 경비원이 '해고 취소 서명'을 벌인 입주민들 덕분에 다시 일할 수 있게 됐다. "주민 80%가 싫어한다"는 게 계약 만료 사유였지만, 이 아파트 입주민 절반 이상이 경비원 A씨를 위해 서명했다. 다만 이 경비원은 다시 3개월짜리 '초단기계약'으로 재고용되면서 3개월 후엔 다시 마음을 졸여야 하는 처지다.


"주민 80% 싫어한다"고 했는데…490여 가구가 서명 동참

29일 해당 아파트 입주민 등에 따르면, 이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이날 오전 A씨의 고용 계약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에는 최근 입주민들이 진행한 'A 경비원 해고 취소 서명' 영향이 컸다. 이 서명에는 닷새 만에 총 760가구 가운데 절반 이상인 490가구가 동참했다. 서명을 주도했던 아파트 입주민은 "A경비원이 일자리를 잃지 않을 수 있게 돼 너무 다행이다"라며 "다른 입주민들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앞서 관리사무소는 지난달 28일 "주민 80%가 싫어한다"는 이유를 대며 A씨에 고용 계약 만료를 통보했다. 그러나 A씨는 고령 입주민들의 짐을 들어 옮겨주곤 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선풍기 등 작은 가전도 고쳐주는 등 아파트 입주민들에겐 '가족 같은 존재'였다. A씨 소식을 알게 된 입주민들은 관리사무소 측에 A씨 재고용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A씨 해고 취소 서명 운동에 나섰다.

입주민들은 호소문에 "2019년부터 4년간 우리 아파트에서 성실히 일해 오신 ○○○ 아저씨(체구가 작고 서울 말씨를 쓰심)께서 해고통지서를 받았다"며 "경비원 아저씨에게 ○○아파트는 생계다.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가장인 경비 아저씨의 손을 잡아주는 품격 있고 따뜻한 입주민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적었다.


3개월 후 다시 마음 졸여야…근본적인 대안은 가이드라인·법 개정 필요

다시 일할 수 있게 됐지만 A씨는 다시 3개월짜리 고용계약서를 써야 한다. 이 아파트 관계자는 "A씨뿐 아니라 모든 환경미화원, 경비원들이 3개월짜리 단기계약"이라고 말했다. 입주자주민대표회의와 관리사무소 측이 A씨의 고용은 유지했지만 3개월 후 또는 다른 경비원과 미화원들에게도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구조는 여전한 셈이다.

노무법인 삶의 최승현 노무사는 "현재로선 이 아파트에서 3개월 후 또다시 같은 문제가 얼마든지 되풀이될 수 있다"며 "짧은 근로 기간이 경비원 갑질이 반복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최소 계약기간을 정하도록 대구시 등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가이드라인을 내놓거나 관련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인사 갑질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14일 극단적 선택을 한 강남구 아파트 경비원도 최근 3개월짜리 단기 고용 계약을 맺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비원 A씨 "주민분들 덕분에 살아 있다" 감사 인사 전해

A씨는 이날도 오전 6시쯤 이 아파트 경비실로 출근했다. 그의 근로 시간은 매일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다. A씨는 본보 통화에서 "오늘 관리소장으로부터 다시 일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관리소장에게) 고맙습니다, 앞으로 더 잘하겠습니다, 더 열심히 할 테니 조금만 봐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 본사를 둔 한 여성복 업체에서 디자이너로 40여 년간 근무 후 5년 전 은퇴했다고 한다. 은퇴 후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경비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2019년부터 이 아파트에서 처음으로 경비원 일을 시작했다.

A씨 가족은 언론에서 이 아파트 관련 내용을 접하고도 자신의 아버지가 해당 사연의 당사자라는 점을 몰랐다고 했다. A씨는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계약 만료 통보를 받은 것도, 일하며 힘들었던 점도 이야기하지 않아왔다"며 "언론 보도를 보고 자녀들이 물어왔을 때도, '보지 말아라'라고만 했다"고 말했다.

A씨는 자신을 위해 애써준 주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해고 통보를 받고 지난 한 달간 식사도 잘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 주민분들 덕분에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며 "많은 주민들이 응원해 주신 덕분에 내가 아직은 여기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도와주신 주민분들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원다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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