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입시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취업이 보장된 주요 대학의 반도체 계약학과에 합격한 학생들이 등록을 포기하고 의대로 진학한 것을 두고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은 "내가 부모여도 자식에게 의대를 권했을 것"이라는 자조 섞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회사에 가는 것보다 의사가 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연봉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나라 수출액의 약 20%가 반도체에서 나오고 있고 전 세계 주요 국가에서도 반도체 산업을 미래의 핵심 먹거리로 보고 과감한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핵심 인재의 의대 선호 현상이 이어질 경우 국가 경쟁력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까지 제기된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구동칩을 만드는 시스템 반도체 기업인 매그나칩의 김영준 대표는 30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한국에서는 의사만큼 안정성 있고 돈을 잘 벌 수 있는 직종이 없다 보니 의대로 인재들이 몰리는 반면 미국에서는 S급 인재들이 공대를 가고 스타트업 창업에 도전한다"며 "반도체 기술력 면에서 한국과 미국의 차이를 가져온 결정적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 코넬대 전자공학 석사를 마치고 인텔과 삼성전자, 캐비엄 등 글로벌 주요 반도체 회사를 거친 전문가다.
무선통신 반도체 업체인 라디오펄스를 미국 기업에 매각하고 2017년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 네메시스를 창업한 왕성호 대표(한국팹리스산업협회 대외협력위원장) 역시 "'애국심으로 반도체 학과를 가라'가 아니라 '내가 의대를 안 가고 반도체 학과를 갔을 때 부자가 되겠구나'라는 실질적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며 "미국의 스탠퍼드 우등생들이 구글이 아니라 스타트업에 가서 회사를 성공시켜 구글, 애플에 매각해 수백억 원을 받고 다시 후배들에게 재투자하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미국은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됐다"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은 지금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중심의 국내 반도체 생태계에서는 창업 대박의 꿈을 좇아 학생들이 반도체 학과에 지원하는 환경을 만들 수 없다고 지적한다. 반도체 스타트업이 활약할 수 있는 분야는 시스템 반도체 영역인데 전 세계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3% 남짓으로 사실상 불모지이기 때문이다.
시스템 반도체는 데이터 연산과 제어 등을 담당하는 장치로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부터 통신칩, 전력반도체, 이미지센서 등 종류가 다양하다. 반면 세계 시장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잘 한다는 평가를 받는 메모리반도체는 D램·낸드플래시 등 데이터를 저장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대규모 투자가 선제적으로 필요한 만큼 진입 장벽이 높다. 또한 메모리 반도체는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반면 시스템 반도체는 소량 생산으로도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고부가가치 분야로 꼽힌다. 기업이 설계만 하고(팹리스 방식) 제작은 위탁생산 기업(파운드리)에 맡기면 되기 때문에 창의적 아이디어와 뛰어난 기술력을 지닌 스타트업들이 맹활약하고 있다.
시장 규모로도 시스템 반도체의 비중은 70%로 메모리 반도체 대비 두 배 이상 크며 시장의 업황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다. 인텔, 퀄컴, 엔비디아, AMD 등 미국 기업이 시스템 반도체 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다.
다만 업계에서는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이제 막 꽃피기 시작하는 첨단 분야에서는 국내 기업들에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왕 대표는 "반도체 산업이 발전하려면 ①정보기술(IT) 인프라가 발전해 있고 ②반도체 관련 인력이 우수해야 하며 ③반도체 사업 경험이 풍부해야 하는데 이런 나라는 전 세계에 몇 개 없다"라며 "AI, 지능형 메모리(PIM), 자율주행 등 분야의 시스템 반도체에 마중물만 준다면 좋은 결과를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동안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민간 영역은 기업이 알아서 잘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보니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같은 대기업만 살아남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소 규모의 기업도 생존하기 위해선 정부의 과감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국내 시스템 반도체 기업들이 겪는 애로 중 하나는 자신들이 개발한 반도체를 제때 생산해 줄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기업을 찾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국내에선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사업을 하는데 주로 퀄컴, AMD 등 글로벌 대형 고객사들의 첨단 제품을 우선적으로 생산한다. 김 대표는 "지난해 반도체 부품난 당시 대만에서는 정부가 TSMC에 자국 시스템 반도체 기업의 물량을 우선적으로 맡도록 했다"며 "반면 국내 시스템 반도체 기업들은 대만이나 중국 파운드리 기업의 눈치를 보며 기다려야 해 큰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자금적 지원도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설계한 반도체를 시험 제작해 테스트하는 비용만 20억 원이 넘는데 중소기업 입장에선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라며 "반면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중국의 경우 정부가 그 비용을 다 대주면서 시스템 반도체 기업들의 성장세가 가파르다"고 말했다. 지난해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발표한 '글로벌 시총 100대 반도체 기업 경영지표 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시총 100대 반도체 기업 중 한국기업은 3개(삼성전자, SK하이닉스, SK스퀘어)밖에 없는 반면 중국은 42개사나 이름을 올렸다.
기업들도 뼈아픈 반성을 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왕 대표는 "삼성전자, LG전자 같은 글로벌 전자기업이 한국에 있는 건 축복이자 재앙이었다"며 "이들만 믿었다가 기술 발전에 뒤처져 결국 해외 트렌드를 쫓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미국에선 특별한 노하우를 가진 개발자들에게 수십억 원의 연봉을 주는 반면 우리나라 기업들은 관례상 그런 파격 보상을 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핵심 인재들에게 적극적으로 회사 주식을 제공해 회사가 성장하면서 함께 직원들도 돈을 버는 기업 문화를 만드는 것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