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지방선거를 앞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게 ‘호재’가 쏟아지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징용) 문제 해결책 발표와 한일 정상회담, 우크라이나 전격 방문 등 외교적 빅 이벤트와 일본 국가대표팀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우승이라는 희소식에 힘입어 기시다 내각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기시다 총리의 21일 우크라이나 방문 성과가 예상보다 더 컸다고 자평한다고 지지통신이 23일 보도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모스크바에서 회담한 날과 겹치면서 극적 효과가 커졌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지방선거 약 한 달 전에 정권에 훈풍을 불어넣었다"고 지지통신에 말했다. 외무성 관계자도 "기시다 총리가 결과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시점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났다"고 말했다.
같은 날 일본이 WBC 결승전에서 세계 최강 미국을 누르고 ‘만화 같은’ 승리를 한 것 역시 기시다 총리에게 '득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국가대표팀이 선전하면 집권 세력이 득을 보는 게 통상의 선거 공식이다. 더구나 일본 열도가 사랑하는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가 삼진을 잡아 결승전을 끝낸 것은 일본인들의 애국심을 한껏 자극했다.
지난달까지 기시다 총리와 내각은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지난해 7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악재가 거듭됐다. 아베 전 총리 사망이 자민당과 통일교의 밀착 스캔들에 불을 붙였지만, 기시다 총리는 강단 있게 대처하지 못했다. 연말에 각료 4명이 도덕성·무능 시비에 휩싸여 연쇄 사퇴한 것은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혔다.
기시다 내각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증세 정책을 발표하는 무리수를 뒀다. 연말엔 방위비 2배 증액 방안을 확정했고, 연초엔 '차원이 다른 저출생 정책' 추진을 못 박았다. 민심은 싸늘했다. 연말 이후 내각 지지율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20~30%대를 맴돌았다.
공교롭게도 반전의 계기를 제공한 건 한국 정부다. 이달 6일 한국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과 관련해 일본의 입장을 수용, 제3자 변제 방식의 해결책을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통 큰' 양보에도 기시다 총리는 고자세로 맞섰다. 16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그는 “역대 일본 내각의 담화를 전체적으로 계승한다”고만 했다. 이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방류,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규제 해제, 독도 영유권 갈등 등 한국이 껄끄러워하는 문제의 해결을 기시다 총리가 회담에서 공격적으로 요구했다는 일본 언론 보도가 잇달았다.
기시다 총리는 윤 대통령을 만나 할 말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는 그에게 반감을 가졌던 국내 여론을 누그러뜨렸다. 정상회담 이후 여론조사를 보면, 기시다 총리의 리더십을 회의했던 보수 유권자들이 그를 재평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마이니치신문은 “내각 지지율 상승을 이끈 요인 중 하나가 한일 정상회담이다. 기시다 총리의 자신감이 높아졌을 것”이라는 전직 각료의 발언을 전했다.
일본 역사상 최장 기간 외무장관을 역임한 기시다 총리는 자신의 최대 강점으로 외교 능력을 꼽는다. 올해 5월 지역구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분위기를 일찌감치 띄우는 것도 그래서다. 자민당에 '포스트 기시다' 후보군이 없는 상황에서, 기시다 총리가 4월 지방선거 승리를 견인하고 G7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른다면 내년에 총리 재선에 성공할 수 있다는 관측이 일본 정가에서 나온다. '기시다 위기론'이 쏟아졌던 얼마 전과 분위기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