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시집살이 끝났는데...평생 한탄하는 엄마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입력
2023.03.27 04:30
24면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엄마가 마음의 병이 깊습니다. 엄마는 23세에 결혼하여 15년 동안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어요. 엄마가 결혼한 직후 외할아버지가 아프셨다고 해요. 장녀인데도 본인의 가족을 도와주지 못하고 시댁 가족을 챙겨야 하는 현실에 늘 억울함을 호소하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엄마는 아픈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을 돕지 못한 게 다 아빠 때문이라고 저에게 한탄을 했어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몇 년을 편찮으시다가 돌아가셨죠.

우리 가족이 할머니댁에서 분가하고 나서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사셨습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한 편이어서 엄마가 하고 싶은 것은 뭐든 할 수 있었고, 친정 가족을 돕고 싶으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는 환경이었죠. 시집살이가 끝나고부터 엄마는 본인의 형제자매들에게 헌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느끼기에 지나칠 정도로요.

엄마에겐 나이 차이가 열 살 이상 나는 남매들이 있어요. 이모와는 같은 아파트에 살았는데 아이가 태어나자 그 아이를 봐주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이날 이모네 아이들에게 피아노 한 대씩을 사주는가 하면 아빠의 동의도 없이 우리집 중고차를 공짜로 두 번이나 주는 식으로 아낌없이 베풀었어요. 더 큰 문제는 엄마가 30년간 인연을 끊고 살았던 외삼촌을 만나면서 생겼어요. 엄마는 연락이 닿은 외삼촌이 치매를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 집으로 모셔왔습니다. 가족에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채 말이지요. 아빠는 물론이고 저와 제 동생도 전혀 왕래가 없던 외삼촌이었습니다. 중증 치매인 외삼촌을 집에서 돌보기 시작한 지 올해로 10년째입니다. 거동이 불편한 외삼촌은 안방에 누워 있고 엄마가 전담해서 보살피고 있어요. 모든 사회생활을 뒤로한 채 간호에만 매달립니다. 아빠는 거실에서 생활하고 계세요.

치매 환자를 돌보는 것이 엄마 혼자로선 감당하지 못할 만큼 힘든 일이라 늘 가족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가족과 상의도 없이 외삼촌을 데려온 것이 못마땅했지만 차마 외면하지 못해 엄마가 원하는 대로 도와드렸어요. 결혼해서 독립하기 전까지는 외삼촌 목욕 등을 도와드렸고,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도 군말 없이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엄마는 아빠와 동생이 도와주지 않으면 "내 동생도 가족인데 나 몰라라 한다"며 서운해하고 비난했어요.

돌이켜보면 저는 엄마가 시키면 그대로 하는 딸이었습니다. 결혼해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엄마는 지금도 저에게 늘 하소연을 하십니다. "아빠는 내 말은 듣지 않아도 딸이 뭐라고 하면 듣는다"는 말을 앞세우며 끊임없이 저에게 뭔가를 요구해요. 제가 응하지 않을 때면 "네 남편을 가족 단톡방에 불러서 우리집 사정을 까발릴 거다"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어요. 요즘 들어 점점 요구가 잦아지면서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듭니다. 늘 자식노릇을 하라며 부탁하면서도 정작 저희 집에는 한번도 오신 적이 없어요. 둘째를 낳은 지 6개월이 지났는데 엄마는 아직도 태어난 아기를 보지 못했습니다. 친정에 갔을 때도 엄마가 밥 한번 차려준 적이 없어요. 반면 이모부들이 집에 오면 명절처럼 상을 차립니다.

아빠가 30년 금융권에 종사하셔서 집안 형편이 좋은 편이었어요. 그런데 엄마가 돈 관리를 하면서 돈이 거의 모이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적금 하나 없을 정도인데 오히려 퇴직한 아빠에게 돈 벌어 올 생각을 않는다며 불만입니다. 저도 결혼할 때 부모님에게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어요. 그런데도 엄마는 늘 당당합니다. "15년간 시집살이를 당했다", "아빠의 집안에 내 인생을 바쳤다"며 큰소리를 치세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가 결혼해서 집을 나온 이후 엄마와 다른 가족들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졌습니다. 결정적으로 할아버지 장례식에 엄마가 불참하면서 아빠도 마음을 완전히 닫았어요. 결국 아빠는 이혼 이야기를 하고, 동생은 엄마와 의절한 상태입니다.

인간적으로 안쓰러울 때도 있었는데 이젠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아요. 시집살이를 당했다는 핑계 하나로 결국 집안을 풍비박산 냈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원망스럽고 화가 납니다. 늘 본인의 요구사항을 이야기하면서 저의 안부 한번 묻지 않는 엄마를 보면서 마음이 차갑게 식어가요. 평생 시집살이 운운하는 엄마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저 역시 연을 끊어야 할까요.

이민지(가명·34·직장인)

민지씨, 당신은 엄마의 삶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죠. 15년 시집살이는 끝났고, 집안 형편도 좋고, 자식들도 다 키워 잘살고 있는데 도대체 우리 엄마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고 원망이 클 겁니다.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어머니의 인생과 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필요합니다.

민지씨의 어머니 세대는 가족과 타인에 대한 자기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부장적 색채가 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에는 맏딸로 집안을 돌보고, 결혼해서는 자신이 원치 않아도 시댁 가족을 돌봐야 했어요. 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본인을 지운 채 오랜 세월 장녀, 며느리의 역할만 수행해 온 거죠. 민지씨 어머니는 거기에 더해 15년간 시집살이를 했습니다. 본인의 부모가 아프고 어린 동생들을 챙겨야 한다는 마음의 짐을 안은 채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시집살이가 끝난 이후였어요. 어떻게 된 게 예전보다 훨씬 힘든 돌봄을 자처한 것이죠. 미련하리만큼 남만 생각하면서 감당하지 못할 짐을 스스로 다시 짊어진 겁니다.

남을 돌보고 돕는 것이 본인을 기쁘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면 이는 너무나 좋은 삶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그 희생이 내 삶에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는 정도라면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어요. 민지씨의 어머니는 시집살이가 끝난 직후부터 본인의 형제자매를 돕는 데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나서지만, 자신과 자기 가정을 돌보는 일은 등한시했습니다. 항상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지만 추측컨대 어머니의 내면은 내 고통은 무시하고 남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으로 인해 억눌린 분노가 상당히 큰 상태로 보입니다. 정작 어머니 자신은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받으며, 희생을 멈추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떠날 거라는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왔을 거예요. 그러면서 현실적인 문제보다는 도덕적 우월감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됐죠.

민지씨 어머니와 같은 경우를 피학적 성격이라 합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남들의 관심과 사랑을 얻기 위해 자연스러운 이기심을 억누르고 자신을 헌신하는 관계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자기 희생과 고통을 동력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죠. 어머니에겐 그런 삶의 태도가 너무 오랫동안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 나이대 희생하며 살아온 여성들이 그렇듯 어머니 역시 자기를 중심에 두고 사는 삶에 익숙지 않아요.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가족과 나 사이의 경계선을 세우고 거리두기를 하는 방법 자체를 모르니까요. 그러니 이제 와서 그동안 쌓인 부정적인 감정을 어머니에게 쏟아내고 지적해도 쉽게 변화되지 않을 겁니다.

당장은 어머니 자체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어머니의 성향을 충분히 알고, 그래서 어머니의 요구에 거리를 두고 응한다면 어머니에 대한 민지씨의 감정을 조절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거예요. 특히 민지씨 어머니와 같은 피학적 성격 특성에는 '희생에 대한 인정과 격려'가 오히려 독이라는 점을 기억하세요. 어머니가 '15년 시집살이'를 언급하며 희생을 강조할 때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가 선택한 삶"이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피학적 경향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에 둔다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닌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15년의 시집살이나 10년간 병 수발이 다른 누구도 아닌 어머니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녀인 민지씨는 그간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원치 않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왔습니다. 누구보다 어머니의 삶을 잘 알고 있고, 그만큼 어머니를 향한 애증이 클 거예요. 쉽지 않겠지만 어머니의 행동이나 생각을 바꾸겠다는 생각보다 어머니의 성격 자체를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 보세요. 그 과정에서 마음에 남아 있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 서운함,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 또한 그대로 인정하세요. 사랑하는 가족의 한계를 직면하고 수용하는 것은 무척 실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를 온전히 수용할 때 상대방에 대한 나의 기대와 고통을 조절할 수 있고, 그래야 내 삶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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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손효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