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는 한일 정상회담에 앞서 강제동원 피해배상 해법을 발표했습니다. 소송에서 진 일본 전범기업이 아니라 우리 기업이 대신해 피해자에게 배상하는 방안이었죠. '일방적 양보'라는 비판이 빗발치자 여권은 '엘리제조약'에 비유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가 보불전쟁과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철천지 원수관계로 악화된 적대관계를 1963년 청산하고 외교·국방·경제·교육 등 전 분야에서 협력을 도모한 조약입니다.
독일(서독)과 프랑스는 격하게 충돌한 과거사 문제를 '회색지대'에 남겨 놓고 미래세대를 위한 협력의 길로 나아갔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대통령실은 엘리제조약 결과물이 이번 윤 대통령의 방일 성과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는 조약 체결 이후 유럽의 질서를 주도하는 리더국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엘리제조약이 구심점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죠.
우리는 어떨까요. 60년 전 독일과 프랑스가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한 것처럼 한국과 일본도 미래를 향해 힘차게 전진할 수 있을까요. 윤 대통령의 '결단'으로 한일관계의 물꼬를 텄다고 자평하는 지금, 과거 엘리제조약의 의미를 곱씹어 보는 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요.
하지만 전문가들의 평가는 그리 호의적인 것 같지 않습니다. 독일과 주변국 간 화해의 역사를 연구한 릴리 가드너 페드먼 미 존스홉킨스대학교 미국현대독일연구소 연구원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프랑스와 독일이 아닌, 이스라엘과 독일 관계에 가깝다고 분석합니다.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독일) 총리의 '담대한 결단'은 과거사와 역사논란을 회색지대에 뒀지만, 나름 동등한 관계에서 역사를 분석하는 작업이 이뤄져 여론 반발이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합니다. 한일 정상회담 이후 피해 당사자들을 포함해 국내 반발여론이 거센 것과 사뭇 대비됩니다.
이와 비교해 이스라엘과 독일은 관계 정상화 과정에서 극한의 대립을 보였죠. 이스라엘은 아데나워 총리가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유감을 표명하고 화해금 지급 의사를 밝히자 '법적 배상'을 해야 한다며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그래서 1952년 맺은 배상협정을 두고 독일은 '피해회복금'(wiedergutmachung), 반면 이스라엘은 '법적 배상금'(shilumum)이라며 서로 다른 표현을 씁니다. 서로 다른 단어의 해석 차이를 놓고 양국은 갈등을 반복했습니다. 1965년 이스라엘과 독일은 수교를 했지만, 양국관계는 최소한의 분야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1965년은 한국과 일본이 청구권협정을 맺고 수교한 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성공사례로 회자되는 엘리제조약 체결 과정을 들여다볼까요. 드골 대통령은 '역사'를 독일과의 관계 회복에 결정적 변수로 두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독일을 처참하게 짓밟아버려야 한다"고 과거 얘기하고 다닌 것과 다르게 말이죠. 이 배경엔 프랑스의 나치 처단 노력과 패전 이후 독일 정부의 나치 분리 시도도 있었지만 그건 논외로 합니다. 드골 대통령은 역사논쟁을 벌이기 보단 2차 세계대전에서 속수무책으로 독일에 당한 패전국 이미지를 떨쳐버리고 싶어 했습니다. 더구나 미소 냉전이 격해지면서 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시점이었죠.
이에 드골 대통령은 외교로 눈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독일과 협력해 유럽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드골 대통령은 예전이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아데나워 독일 총리를 파리 교외의 자택으로 초청해 정중하게 화해와 외교적 협력을 제안했습니다. 물론 순서상 관계회복 제안은 아데나워 총리가 먼저이긴 했지만, 역사 책임 규명을 요구하며 버틴 이스라엘과 달리 드골은 전향적으로 화해의 손을 맞잡았습니다.
두 정상은 이후 4년간 15번의 만남, 100시간이 넘는 토론, 40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독일과 프랑스의 적대관계를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론의 반발이 적지 않았죠. 하지만 드골 대통령은 “프랑스의 국익을 위한 길”이라고 연설하며 국민들을 설득했습니다. 독일을 상대로 오랜 교감의 시간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이를 계기로 프랑스는 미소 강대국 사이에서 몸값이 치솟았습니다. 무엇보다 유럽 통합의 길을 열었습니다. 외교가에서 “화해를 받아들이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반대로 전범국 독일을 이끈 아데나워 총리 입장에서 살펴볼까요. 독일은 프랑스를 포함해 이스라엘·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와도 관계개선을 이룹니다. 모두 전쟁으로 씻을 수 없는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 국가들이죠. 그 배경에는 아데나워 총리의 ‘진심 어린 사죄’가 깔려 있다고들 합니다. 물론 사죄만으로도 일본과 극명하게 차이 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를 가능케 한 또 다른 요인이 있습니다.
아데나워 총리가 과연 자발적으로 주변국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을까요. 국제사회의 대대적인 압박 때문에 독일이 어쩔 수 없이 저자세로 나온 측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홀로코스트에 분노한 이스라엘은 나치에 의한 학살 경험을 공유하는 폴란드, 체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와 연대해 독일을 압박했습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에 따른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들 국가의 무역압박은 사실상 경제제재였고, 재앙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독일로서는 별다른 묘안이 없었죠. 패전국 지위를 벗어나 과거 독일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내부적으로는 나치와 단절하고,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인 화해와 반성의 제스처를 취해야 했죠.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를 찾아 무릎을 꿇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시민단체들도 국제연대를 통해 독일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2000년 설립한 ‘기억과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이 단적인 사례입니다. 1998년 미국시민권자인 유대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독일의 폭스바겐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소송은 일파만파로 퍼져 다른 독일 전범기업들로 확대됐죠. 이때 미국 정부가 외교적 협상에 나서자 홀로코스트 피해 경험을 공유하는 이스라엘, 벨라루스, 체코, 폴란드의 피해자들이 힘을 모읍니다. 그렇게 양자 협상은 7개국의 협의로 발전해 독일의 추가적인 사과와 보상을 이끌어냈죠.
이처럼 독일 정부는 외교 입지 확대를 위한 정치적 필요성과 국제사회의 압박에 못 이겨 기회만 되면 참회하고 반성하는 길을 걷습니다. 하지만 이런 독일도 다른 식민지배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나미비아 등 아프리카 국가에서 자행한 학살에 대해서는 2004년 이후에야 사죄의 뜻을 표명했으니까요. 상대국이 국제사회에서 크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이후 외교협상을 거쳐 2021년 나미비아에 공식 사죄하고 9억4,000만 달러(약 1조2,300억 원)의 개발 원조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도의적 책임만 인정했을 뿐, 법적 배상은 없었습니다. 배상액도 나미비아 측이 요구한 액수보다 적었고, 배상금은 개인 피해자가 아닌 나미비아의 재건과 경제개발 명목으로 지급됐습니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당시 우리가 피해자 개인은 쏙 빠지고 일본과 정부 간 협정으로 주고받은 것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이제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 드골 대통령과 아데나워 총리의 차이점이 뚜렷해집니다. 프랑스와 독일이 우여곡절 끝에 매끄러운 아스팔트 길로 양국의 미래를 열어 갔다면, 한국과 일본은 아직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핵심은 독일과 달리 진심 어린 사죄와 반성이 부족한 일본의 태도입니다. 엘리제조약이 한국과 일본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모범사례로 언급될 때마다 국내 역사학자들이 "일본은 아데나워처럼 과거사를 반성하고 있지 않아 불가능하다"고 지적하는 이유입니다.
이에 더해 펠드먼 연구원은 사과가 아니라 이행의 문제까지 지적합니다. 일본이 과거 내각의 담화 등을 통해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는 했지만, 역사와 관련한 '일관된 노력'이 부재한 탓에 화해가 어렵다는 것이죠. 실제 일본 정부는 자국민에게 가해역사를 직시하기 위한 역사 교육은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역사교과서 검증 기준을 강화하면서 가해의 기록을 지우기 바빴습니다. 일본 교과서 검정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위안부, 독도, 강제동원 기술을 놓고 우리 정부와 얼굴을 붉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과 동아시아판 엘리제조약을 만들 수 없는 것일까요. 전문가들은 독일과 이스라엘 사례에 주목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첨예한 역사 갈등 때문에 독일과 이스라엘은 수교 이후에도 최소한의 영역에서만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놓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공동 역사연구입니다.
비록 원한이 뼈에 사무치지만 양국관계를 관리하기 위해 역사교과서에 착안했고, 상호 불신을 점진적으로 줄여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후 양국 국민들을 갈라놓은 감정의 골은 과거에 비해 완화됐습니다. 화해는 고공플레이를 하는 외교관들의 영역이 아닌, 국민 정서의 문제라는 점을 일찌감치 간파해 아래에서부터 차이를 좁혀 나간 것입니다.
조윤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한일관계가 좋았을 때 한일 공동역사연구를 비롯해 역사를 둘러싼 건강한 토론이 이뤄졌다"며 "그래야 일본에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조 연구위원을 비롯한 역사학자들은 과거사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일본의 일관된 태도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면, 한일 간 교류를 우선 활성화해 상호 역사를 직시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지도자의 결단도 중요하지만, 양국을 하나로 묶는 접점을 다양하게 늘려 나간 바탕 위에서 정치적 제스처가 가미돼야 훨씬 효과적이라는 의미로 풀이됩니다. 윤 대통령이 한일관계의 물줄기를 틀었지만 아직은 박한 평가가 적지 않게 나오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