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농사일에 지쳤을 텐데도, 어머니는 호롱불을 켜놓고 밤새 비단 홀치기 작업을 했다. 간간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멈췄을 때는, 어머니가 호롱불에 언 손가락을 녹이는 짧은 순간이었다. 그땐 어머니가 만든 비단이 일본으로 수출된다는 것까지 몰랐다. 아버지가 타지로 나가고 없는 우리 집에 유일한 수입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홀치기 틀 앞에 앉아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하루 세 시간 이상 누워 주무시는 걸 본 적 없었다.
할아버지 때는 천석꾼 소리를 들을 만큼 부자였다. 큰집은 그럭저럭 살았지만 우리 집은 급격히 쇠락했다. 삼시 세끼를 고구마로 때울 때가 많았다. 보리밥도 귀했다. 아버지는 선비처럼 진종일 옛날 책에 파고드는 것이 일과였다. 공군 헌병에 김천시청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었으나, 천성이 부잣집 도령이었다. 농사를 전혀 몰랐다. 어머니가 일을 도맡았다. 밭일은 물론이고 소쿠리를 만들고 괭이자루를 깎는 것도 어머니의 재주였다.
아버지는 집안이 쇠락하자, 집을 떠났다. 그렇게 7년을 집을 비웠다. 초등학교 무렵, 형님마저 외지로 나가고 나와 어머니, 그리고 두 동생이 집에 남아 하루하루 고구마로 버텼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그렇게 밤새 홀치기를 해서 한 달에 얼마를 버느냐”고 물어 보았다. "2,400원쯤 된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대답을 듣고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시내로 나갈 마음을 먹었다. 어머니가 힘들게 일하시는 걸 번연히 알면서 밥 얻어먹고 학교 다니는 건 사내로서 못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열여섯 살에 고향인 아포에서 김천 시내로 향했다. 처음 취직한 곳은 시장통의 철물점이었다. 철물점 점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루는 가게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데 고등학생 몇 명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중학교를 함께 졸업한 친구들이었다. 나는 얼른 가게 뒤로 가서 몸을 숨겼다. 김천에서 일하기는 힘들겠다 싶었다. 며칠 후 철물점 일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갔다.
두 번째 일자리는 왕십리의 가구점이었다. 한 달 월급 1만원 중 9,000원을 밥값으로 떼어갔다. 먹여주고 재워줄 테니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개념이었다. 8명이 기숙사 생활을 했다. 말이 기숙사이지 지금 생각하면 철거 직전의 건물이나 다름없었다. 천장에 큰 비닐을 받쳐 놓았는데, 비만 오면 비닐 이곳 저곳에 물이 고여 축축 늘어졌다.
밥은 나무를 때서 지어 먹었다. 식사 준비는 막내인 내 몫이었다. 대패질을 할 때 나온 나무 찌꺼기와 못 쓰는 각목 조각 등이 가득 담긴 자루를 등에 지고 2㎞ 넘게 걸어서 숙소로 갔다.
저녁이면 옥상으로 올라가 고향 김천 쪽을 멍하니 바라봤다. 달에 어머니의 얼굴이 비치는 듯했다. 간혹 저녁을 못 먹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물로 배를 채우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울었다. 나지막이 어머니, 하고 읊조리면 가슴이 터질 듯했다.
한번은 그 유명한 왕십리 도넛을 산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돈을 내고 사본 간식이었다. 한입 베어 무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어머니와 동생들 얼굴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열 살 동생들을 데리고 산에 나무를 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막내가 힘들다고 울었지만, 나는 무척이나 엄하게 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동생의 얼굴에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너 돈 몇 푼 번다고 도넛을 다 사 먹냐! 날카로운 말 한마디가 벼락처럼 내 가슴을 할퀴었다. 그건 나 자신을 향한 자책이었다. 나는 입안에 든 도넛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고 도로 뱉었다. 결국 도넛을 한 입도 먹지 못했다. 이후로 돈을 허투루 쓴 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발소에 갔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머리카락이 워낙 텁수룩했다. 헤어스타일도 그렇지만 그때 나의 행색은 한 마디로 거지꼴이었다. 아무리 70년대라지만 고무신을 신고 왕십리를 걸어 다녔고, 속옷에 구멍이 숭숭 나 있는 데다 여름에도 겨울 옷을 입고 겨울에도 여름옷을 겹겹이 껴입었다. 한 마디로 닥치는 대로 입고 다녔다.
"너 김재원이지?"
면도를 하려고 이발 의자에 누워있는데 이발사가 내게 속닥거렸다. 얼굴을 보니 6학년 때 짝꿍이었다. 나는 몸이 돌처럼 굳었다. 초라한 모습을 고향 사람에 들킨 것이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나는 어 그래, 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면도 후 도망치듯 이발관을 빠져 나왔다. 며칠 후 그 친구가 가구점을 찾아왔지만 나는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대구로 내려왔다. 열아홉 즈음이었다.
대구에서 사출 공장에 취직을 했으나 그 일 역시 가구공장처럼 돈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어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조바심이 돈이 되는 일을 찾았다. 고심 끝에 자동차 면허를 따서 트럭 운전사의 조수로 들어갔다.
운전을 해보니 운송업은 늘 시간에 쫓기는 일이었다. 차에서 잠을 잤다. 아침을 굶고 새벽에 길을 나섰다. 한번은 대전에서 짐을 싣고 문경으로 향했다. 저녁 늦게 문경에 도착해 짐을 묶은 고무줄을 당기는데 줄이 뚝, 끊어져 버렸다. "앗!" 나는 20m쯤 날아가 볏단에 풀썩 떨어졌다. 한참 만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전봇대를 운반할 때도 있었다. 그 시절 도로변에 삐딱하게 기울어 있는 가로수가 종종 눈에 띄는 이유를 전봇대 싣고 다니면서 알게 되었다. 전봇대를 아무리 단단하게 묶어도 조금씩 흘러내리기 마련인데, 그러면 전봇대 끝을 가로수 줄기에 갖다 대고 차를 후진시켜 다시 추슬러 올렸다. 가로수에 생채기가 나는 건 물론이고 전봇대에 밀려 뒤로 기울어지기 일쑤였다.
끼니를 거르는 건 다반사였다. 한번은 경북 군위군의 화산마을로 트럭을 몰았다. 전날 저녁부터 당일 아침과 점심까지 굶은 상태였다. 짐을 내린 후 나도 모르게 그 집 부엌으로 쑥 들어갔다. 먹다 남긴 음식이 있었다. 갈치 뼈다귀와 멀건 김치 죽이었다. 나는 죽을 숭늉 마시듯 단번에 후루룩 들이켠 후 갈치 뼈다귀를 입에 넣고 쭉쭉 빨았다. 짭조름한 맛에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일년 남짓 화물 운송을 하다가 택시운전사로 전업했다. 처음 회사를 찾아갔을 때 나이가 어리다고 받아주지 않았다. 안 된다고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나는 새벽 2시부터 회사 사무실 앞에 가서 죽치고 기다렸다. 사흘을 그랬더니 담당자가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자네는 고집이 좀 세구먼."
택시도 그냥 몰아선 돈이 안 됐다. 정보를 수집했다. 팔공산 밑에 가면 기도하고 내려오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팔공산 자락에 가봤더니 역시나 손님이 많았다. 시내를 도는 것보다 몇 배 이상 돈벌이가 되었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 자리에 누워 3시간 이상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 돈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동생이 경북대에 입학을 했기 때문에 학비며 생활비도 필요했다. 한번은 새벽 두 시에 자취방으로 살금살금 갔다. 동생이 자고 있으면 택시 시동을 끄고 잠자리에 눕고, 동생이 공부를 하고 있으면 일하러 갈 생각이었다. 동생은 공부를 하고 있었다. 4시까지 운전대를 놓지 않았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도 열심히 돈이 되는 일을 찾았다. 택시에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손님이 타면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좋은 자리 있으면 소개해 달라”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다 택시보다 더 돈이 되는 일을 소개받았다. 덤프트럭 운전이었다. 그 즈음 대구시 이현동이 한창 개발될 때여서 인근 강변의 자갈과 모래 채취에 트럭이 대거 동원됐다. 트럭을 강 안까지 몰고 가서 포크레인이 자갈을 실어주면 밖으로 나왔다.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을 깃대를 꽂아 표시해 두었는데, 깃발을 벗어나면 차가 물에 잠길 수도 있었다. 긴장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운전으로 두 동생을 부양하다가 1979년 7월2일에 입대를 했다. 논산훈련소 28연대에서 훈련을 받고 의정부에 배치 받았다. 이후 사회에서의 경력을 살려 운전병으로 장교들을 상대했다.
군에서 제대한 뒤에 한국노키아에 입사했다. 운전병 경력이 요긴하게 쓰였다. 사장차를 몰면서 쌓은 다양한 인맥으로 30대 중반에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도 믿을 건 성실성 하나뿐이었다. 첫 사업은 카센터 겸 세차장이었다. 일본에 갔다가 스팀세차를 보고 구미에 제일 먼저 스팀세차를 도입했다. 그 바람에 돈을 좀 만졌다. 폐차장에 다니면서 좋은 부속을 찾아내 저렴하게 판매하기도 했다. 돈이 되는 일을 찾아 다녔고, 신기하게도 돈 만드는 길이 보였다.
사업에 자신감이 붙었다. 좀더 큰일을 해보자 싶어서 그때까지 모은 자금으로 공장부지를 매입해 삼성 1차 밴드기업의 하청을 따냈다. 이 역시 좋은 인연이 있어 가능했다. 거의 매일 공장에서 숙식하다시피 했다. "성실하고 의리 있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사업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하는 일마다 성공하십니까?"
그렇게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 나는 두 가지 대답을 한다. 첫째는 좋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다. 둘째는 나이 쉰이 되도록 잠자리에서 잠을 푹 자본 적이 없다. 늘 바쁘게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회사가 더 나아질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요즘 방송에 ‘선을 넘는 녀석들’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던데, 그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노력도 선을 넘을 만큼 해야 결실이 맺힌다고 믿는다. 내가 살아보니 선을 넘어야 성과가 나왔다. 그 간단한 비결을 꾸준히 실천한 것뿐이었다.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가장 행복했던 것은 어머니에게 용돈을 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몇해 뒤부터 많지는 않았지만 다달이 용돈을 드렸다. 1987년에는 제법 형편이 풀려 용돈을 대폭 올려드렸고, 사업이 본격화된 1990년대에는 제법 넉넉하게 넣어드렸다. 2000년대에는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하면 액수를 따지지 않고 부쳐드렸다.
가세가 기울면서 팔아야 했던 땅도 다시 사들였다. 고향 아포에 넓은 땅을 사서 반송을 심었다. 어머니의 정원이었다. 어린 시절의 결심을 결국 이루어냈다.
"여기 좀 앉아봐라."
내 나이 쉰이 되던 해였다. 어머니가 나를 불러 앉히고 긴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이제 형편이 좀 나아졌으니 이 이야기를 해도 되겠지."
그 즈음 회사가 구미에서 탄탄한 강소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우리 집안에 왜 갑자기 기울어졌는지 아나?"
힘들어진 시점은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사정은 몰랐다.
"그때 너희 큰아버지가 우리 집 몫의 땅까지 다 팔아버렸다. 너희 아버지가 돈을 못 번 것도 있지만, 큰집에서 우리 집 땅을 자기 재산처럼 처분한 것도 크다. 힘들어진 내력이 그렇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한번도 큰집 탓을 하지 않았다. 우리 집이 고구마를 먹으면서 버틸 때 큰집에서는 쌀밥을 먹었고, 돈 한푼 보태어준 적이 없었으나 어머니는 그와 관련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늘 책을 가까이 하는 분이었다. 없이 살아도 이웃에겐 늘 내주기를 잘해서 속으로 미워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내게 베풀며 사는 법을 가르치신 분이었다. 당신은 내가 노키아에서 일하던 30대 초반에 돌아가셨다. 1990년 11월이었다. 젊어서 형님에게 재산 다 빼앗기고 자식이 잘되는 걸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참으로 박복한 분이셨다는 생각이 든다.
"우예 큰집에 가서 한번 따지지도 않고, 원망 한번 안 했습니까?"
내가 묻자 어머니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버지 체면도 있고, 큰집에서 우리 사정을 헤아려 주기나 했겠니. 내 한 몸 열심히 살고 버티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너희들 중에 하나는 꼭 성공할 줄 알았다. 험한 세월 꾹 참고 견디면 내 자식들이 좋은 시절을 다시 찾아줄 거라고 굳게 믿으면서 살았다."
그리곤 지천명을 넘긴 아들에게 늘 하던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어디 가거든 넥타이 매고 멀끔하게 차려 입은 사람 옆에 앉지 마라. 힘들게 사는 사람들 이야기 옆에서 앉아서 그 사람 말을 들어줘라. 돈 버는 자랑하지 말고 있는 척하지 마라. 항상 배려해주고 남들 말을 들어줘라."
이제는 그 꿀처럼 단 잔소리를 들을 수 없다. 지난해 11월, 훌쩍 우리 곁을 떠났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시다가 문득 고개를 떨구시고는 저 세상으로 가셨다. 이승을 떠날 때도 평소의 모습 그대로 낙엽이 떨어지듯 다소곳하고 조용하게 떠나셨다.
가끔 고향집에 들러 청소를 한다. 어릴 때부터 집안 청소는 내 일이었다. 어머니를 도와 집안을 청소했던 때처럼 꼼꼼하게 몇 시간이나 쓸고 닦는다.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집안 구석구석을 닦고 있노라면 어머니의 평소 음성이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어머니가 몸소 삶으로 보여주신 가르침들이 내가 번 돈보다 더 가치 있는 유산일 것이다. 고향집을 오래도록 그대로 두고 마음이 어지러워질 때마다 방문해서 청소를 하게 될 것 같다. 이제는 어머니의 집이 내 어머니의 음성이요 체온이니까. 어머니의 집에선 늘 어머니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까.
김재원 기업인
추종호 기자 (cho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