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Me Too)'운동으로 성폭력 피해자가 두려움 없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풍토가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사건 폭로 뒤 수모를 받는 양상은 여전하다.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에게 수많은 피해 여성이 나타났지만 와인스틴은 재판 과정에서 이들을 모두 부와 명예를 얻고자 나선 거짓말쟁이로 그렸다. 이런 음해와 2차 가해에 시달린 성폭력 피해자들이 급기야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말을 믿어 달라고 호소하는 일은 한국에서도 드물지 않다.
미국의 검사 출신 법학자인 데버라 테크하이머는 이처럼 피해자의 신뢰성이 폄하되는 성폭력 사건의 패턴에 주목하고, 그 배경을 법 체제의 결함에서 찾는다. 최근 번역 출간된 신간 '불신당하는 말'은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의 주장을 묵살하는 사회적, 문화적, 법적 요인을 조명하고 변화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책이다.
저자는 와인스틴과 알 켈리 같은 유명인의 성폭력 사건을 비롯한 다양한 실제 사례와 성폭력 피해자, 변호사, 검사, 경찰, 심리학자와 나눈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미국의 형사 사법 체제가 성폭력 피해자를 무시하도록 구조화돼 있다고 분석한다. 가령 각 주의 형법 제정에 영향을 미친 1962년 모범형법전은 여성의 자발적인 술취함과 비자발적인 술취함을 구분하고, 자발적으로 술에 취한 여성에게는 성폭력 피해의 책임을 떠넘긴다.
저자는 피해자의 신뢰성은 떨어뜨리고 가해자의 신뢰성은 과장하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힘의 군집을 '신뢰성 구조'라고 부른다. 이 신뢰성 구조의 기저에 깔린 심리적 이유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피해자에게 닥친 일의 책임이 피해자 자신에게 있을 때, 피해자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신뢰성 구조의 작동 방식을 이해할 때 이런 신뢰성 구조를 해체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