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두 개의 공연을 보러 일본 도쿄에 다녀왔다. 그중 하나는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이끄는 도쿄필하모닉과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공연. 울림 좋기로 유명한 오페라시티 극장에서였다. 지휘봉을 잡은 플레트뇨프는 제6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로, 놀라운 테크닉은 물론 개성적 해석으로 매 라이브 무대마다 객석을 압도하는 피아니스트였다. 젊은 시절의 그를 보듯 젊은 임윤찬 역시 과감하지만 설득력 있는 루바토로 주도적으로 작품 해석을 이끌었다. 분명한 자기 어조로 펼쳐낸 이 젊은 피아니스트의 또렷한 음색은, 작은 소리 하나도 날것으로 토해낸 극장의 섬세한 울림과 전체 음악을 탄탄하게 뒷받침해 준 도쿄필의 뛰어난 연주력과 만나 기분 좋은 무대로 완성됐다.
며칠 후 같은 극장에서 플레트뇨프의 피아노 리사이틀이 있었다. 이날 공연을 본 지인은 "지금까지 실제로 들었던 쇼팽 전주곡 중 가장 이상하고도 가장 아름다운 연주"라고 했다. 플레트뇨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표현이야말로 그가 여전히 '현역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말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덕분에 9월에 있을 그의 한국 리사이틀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높아졌다. 그런데 주최 측으로부터 플레트뇨프는 한국 관객들이 좋아하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수 의견일 수 있지만 예전 내한 무대에서 한 관객은 연주를 듣던 중 극장을 나가버렸고,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플레트뇨프처럼 연주하면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일 수 있다.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제자에게 고수의 변칙을 먼저 가르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에 충실해야 할 음악적 훈련과 음악이 주는 궁극적 즐거움을 구분해 알려준다면 어땠을까.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올해 80세가 넘었지만 무대 위에서 여전히 현역이다. 4년 전 베를린 슈타츠오퍼(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에서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로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와 협연한 아르헤리치의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 공연을 본 적이 있다. 20대 연주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테크닉과 힘, 자유로움으로 꽉 찬 무대였다. 무대와 아주 가까운 자리에 앉았던 덕분에 전체 음악 흐름과 별도로 박자를 젓는 아르헤리치의 발 떨림과 폭풍같이 내리치는 연주에 앞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의 타이밍, 독수리 발톱처럼 웅크렸다가 건반을 낚아채는 타건, 흥미로운 다이내믹을 실연 무대를 통해 경험했다. 그가 얼마나 뜨거운 심장을 가진 연주자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쇼팽 콩쿠르 우승자였던 젊고 아름다운 20대 아르헤리치도 대단했지만 80대에도 관객의 심박수를 한껏 높여놓는 그를 보며 섹시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헤리치가 멋진 부분은 그 나이에도 연주력을 잃지 않았다는 점만이 아니다. 해석의 자유로움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한 피아니스트와 아르헤리치의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연주'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모든 음악은 자연스러울 때가 가장 좋지만 여기에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3년 전 독일 함부르크에서 들었던 아르헤리치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는 분명 베토벤스럽지 않았고 베토벤의 범위를 크게 벗어난 말도 안 되게 특이한 연주였지만 그 연주가 좋았다는 것이다. 베토벤 같은 작곡가의 곡에서 연주자의 개성이 드러나면 작곡가보다는 연주자의 모습이 더 보이게 된다. 더욱이 그 정도로 독특하면 연주가 기괴해지기 마련인데 특이한 개성과 자연스러움은 같이 갈 수 없다는 생각이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듣고 바뀌게 됐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아르헤리치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 앨범과 연주 영상을 찾아봤다. 시대악기 연주단체인 18세기 오케스트라와 시대 건반악기인 에라르 피아노(포르테피아노)로 연주한 것부터 일본 거장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와의 협연, 현역 최고령 지휘자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와 협연한 루체른 페스티벌 라이브 등 다양한 버전이 있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도 유독 초기작에 집중한 아르헤리치의 활동과 기록을 보면서, 베토벤의 색채를 유지하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게 무엇이고 음악의 정통성과 자유로움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멋스럽게 보여줬다는 생각을 했다.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정석'이라는 잣대를 적용하는 이유는 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을 찾기 위함일 것이다.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개성은 불편함과 불쾌감을 안길 수 있다. 하지만 오로지 정석만 추구한 연주가 얼마나 지루함을 느끼게 하는지, 그런 기준으로만 음악을 평가하는 일은 삶을 얼마나 지루하게 만드는지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