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그냥 김정은이다.”
통일부를 출입했던 8년여 전, 데스크가 갑작스레 내린 지시는 파격적이었다. 기사에 북한 1인자의 직함을 넣지 말고 ‘김정은’이라고 쓰자는 것. 물론 첫 문장은 당시 그의 직함인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시작하고 그다음 문장부터 그냥 김정은이라 표기하기로 했다. 그전까지는 그가 등장하는 문장마다 ‘제1위원장’을 꼬박꼬박 붙였었다.
특수 상황을 빼고 신문 기사에 이름 석 자만 박는 경우는 사회면에 등장하는 흉악범이나 문화·스포츠면에 실리는 예술인과 운동선수 정도다. 그만큼 그냥 김정은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북한이 역대급 도발을 하는 등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표기법이 바뀐 이유를 물었더니 데스크는 “직함을 붙일 가치가 없다”는 투로 답했다.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불량정권의 3대 세습자이자 권력을 위해 고모부를 잔인하게 처형한 독재자 아닌가. 게다가 북한 선전매체는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미친개’, ‘박근혜 패당’이라는 원색적 표현을 써가며 비하하고 있었다. 국방부에서 ‘북괴’라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듣던 시절이기도 했다. 오히려 지면상의 호칭 정리가 늦은 감이 있어 보였다. “집권 후 3년 안에 붕괴될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김정은 정권이 장수할 듯하니, 그제야 필요성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데스크의 과감한 결단엔 남북관계가 당분간 진전되지 않을 것이란 판단도 깔려 있었다. 박근혜 정부가 야심차게 꺼낸 통일대박론도, 통일준비위원회도 유명무실해졌거나 개점 휴업 상태였다. 남북 정상이 만날 일도 없어 보였다. 그가 “최고위급 회담도 못할 이유가 없다”며 남북 정상회담을 깜짝 언급한 2015년 신년사 기사를 쓸 때도 호칭을 생략했으니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출입처를 바꿨고 몇 년 뒤 그는 기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돼 있었다. 매 문장마다 ‘위원장’이 따라붙었다. 거짓말처럼 남북 정상이 세 차례나 만났고, 그를 로켓맨이라 비하했던 도널드 트럼트 미국 대통령도 그를 만나 정상 대접을 해줬다. 2018년 4월 문재인 대통령과의 판문점 만찬에서 자신이 준비해온 평양냉면이 멀리서 왔다는 점을 강조하려다 “아, 멀다고 하면 안 되갔구나”라고 수습하는 그의 모습이 실시간 전파를 타면서 인간미를 느꼈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천지개벽할 일이었다. 물론 얼마 안 돼 우리 대통령을 ‘삶은 소대가리’에 비유할 정도로 남북관계가 180도 틀어진 것도 놀랄 일이었고.
국방부가 최근 국방백서에 김 위원장 호칭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새삼 8년 전 기억이 떠오른 이유다. 과거 국방백서에 직책명과 이름 표기가 혼재된 적은 있어도 일관되게 이름만 명기한 것은 처음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현 안보 상황과 북한이 우리 대통령을 지칭하는 부분을 고려해 내린 판단”이라고 했다.
남북관계는 롤러코스터를 타며 반전의 역사를 거듭했다. 국방부의 호칭 생략도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다. 남북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경색된 지금, 누군가는 2009년 임태희 대통령실장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의 비밀접촉 같은 반전을 준비하고 있을 거란 예상도 한다. 남북 모두 이 상태로 5년을 보낼 순 없을 테니. 어떤 반전이 기다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