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국밥 하면 언뜻 부산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작 부산에서도 '밀양'이 상호에 들어간 돼지국밥집이 100개가 넘는다. 부산뿐 아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돼지국밥집 상호에 밀양이 들어간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돼지국밥 원조를 자처하는 경남 밀양에서도 85년째 명맥을 이어가는 노포가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3대째 밀양돼지국밥을 끓이고 있는 동부식육식당이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밀양 표충비를 지나 무안시장 방향으로 200m 정도 지나자 동부식육식당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1997년 지은 지금의 식당 건물 자리는 동부식육식당 사장 최수곤(63)씨 조부가 천막 아래 평상을 차려 놓고 돼지국밥을 팔던 자리다.
최씨 조부는 1938년 양산식당이란 이름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이후 최씨 모친이 인근에 시장옥(현 무안식육식당)이라는 이름의 분점을 냈다. 조부가 작고한 뒤 양산식당은 8남매 중 막내인 최씨가, 모친이 운영하던 가게는 첫째가 물려받았다. 둘째도 1992년 같은 돼지국밥집 제일식육식당을 개업했다. 1대가 양산식당, 2대가 시장옥, 3대가 동부·무안·제일식육식당인 셈이다. 삼형제 가게는 문만 나서면 서로가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지난달 28일 만난 최씨는 “손님들이 형들 가게에 갔다가 자리가 없어서 우리 집으로 오거나, 우리 집에 왔다가 음식이 떨어져 형들 가게로 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면서 “집객효과를 노린 영업 전략은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론 상호 윈윈하는 중”이라고 귀띔했다.
밀양돼지국밥 유래는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지리적 특성 때문이라는 얘기가 가장 설득력 있다. 밀양은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14세기부터 일제강점기 초까지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영남대로와 낙동강 뱃길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짧은 시간 쉬어가는 객들의 요기를 위해 빠르게 차려낼 수 있는 음식이 돼지국밥이었다는 것이다. 미리 해놓은 밥과 국을 주문이 들어오는 즉시 담아 내놓는, 지금으로 말하면 조선시대 '간편식'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다. 경남 통영 명물 충무김밥도 바쁜 선원들이 김밥에 반찬을 넣어 말 시간조차 없어 생겼다는 게 정설로 통하는 것과 비슷한 유래다.
만화 ‘식객’의 허영만 화백은 ‘소 사골로 끓인 설렁탕이 잘 닦인 길을 가는 모범생 같다면 돼지국밥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반항아 같은 맛’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동부식육식당 돼지국밥만큼은 예외다. 흔히 아는 돼지국밥과 달리 다소 말갛기까지 한 국물은 호불호 없는 깔끔한 맛으로 손님들을 끌고 있다. 5년 단골 유석란(64)씨는 “돼지국밥은 누린내 때문에 아예 입에도 대지 못했는데 여기 국물 맛을 보고부터는 국밥 마니아가 됐다”면서 “밀양에 올 때마다 꼭 들르는 집”이라고 말했다.
반항아 같은 맛을 모범생 같은 맛으로 바꾼 비결은 돼지뼈 대신 소뼈로 우려낸 육수에 있다. 소 다리뼈인 사골에 일부 잡뼈를 섞어 최소 7시간 이상 끓여내는 게 동부식육식당만의 특징이다. 최씨는 "잡뼈를 넣어야 국물이 더 진한 맛을 낸다"고 말했다. 국물에 들어가는 고기도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받아 직접 손질한다. 매일 삶아내는 고기 양은 하루 평균 35kg이다. 삶은 고기는 최씨 부인 김상이(62)씨가 일일이 칼로 썰어 손님상에 낸다.
전라도 출신인 김씨는 음식 솜씨가 좋아 배추김치와 깍두기도 직접 담근다. 으레 밑반찬으로 따라오는 부추무침은 없다. 김씨는 "부추는 돼지 냄새를 잡기 위해 곁들이는데 우리 국밥은 그럴 필요가 없다"며 “다진 양념(다대기)과 새우젓도 넣지 말고 국물 맛부터 봐야 참맛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물을 적당히 머금어 담백하면서도 부드러운 살코기도 비계라곤 찾아볼 수 없어 처음 돼지국밥을 접하는 손님들도 거부감이 없다.
8남매 중 막내인 최씨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식당 일을 도우며 자라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군대 제대 직후부터 국밥을 끓이기 시작한 최씨는 매일 새벽 6시부터 오후 9시까지 설과 추석 당일을 뺀 1년 363일을 쉬지 않고 일했다. 지금처럼 일주일에 한 번 쉬기 시작한 건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자리를 잡고도 일하는 사람을 구하는 게 쉽지 않은 탓도 있다. 일하겠다고 와선 곁눈질로 국밥 만드는 것만 배워 나간 뒤 가게를 차린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최씨는 “진짜 잘 먹고 간다”는 단골들의 인사를 들으며 힘을 내고 있다. 최씨는 "30년째 경남 마산에서 한 달에 2, 3번씩 오는 노인이 있는데, '국밥 덕분에 오래 산다'고 한다"면서 웃었다. 김씨도 “어린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손님들이 많이 오는 편”이라며 “상주 인구는 적지만 가게 덕분에 그래도 마을이 북적북적 사람 사는 곳 같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힘이 난다”고 했다.
질릴 만하지만 최씨는 지금도 매일 돼지국밥을 한 그릇씩 먹는다. 밖에서 약속을 잡아도 절반은 국밥집이다. 최씨는 ”계속 국밥을 먹다 보면 새로운 맛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내가 만든 음식에 대한 자부심도 생긴다“면서 ”내가 맛있고 좋아하는 음식이어야 손님에게도 떳떳하게 내놓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남다른 애정을 쏟은 만큼 대를 이어가고 싶은 욕심도 크다. 최씨는 “오래된 음악을 듣다 보면 과거에 그 음악을 들었던 장소, 시간, 느낌 등이 떠오르는 것처럼 노포도 똑같다“면서 ”자식 중 누군가 가게를 4대째 이어받아 100년 이상 손님들의 소중한 추억을 담아내는 장소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