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시민-여성운동을 이은 '뒷줄'의 활동가

입력
2023.02.2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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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y Hayden(1937.10.31~2023.1.4)

1960년 11월,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전국대학연합(NSA) 대의원대회가 열렸다. 학생운동이 평소처럼 캠퍼스 이슈에만 집중할지 세상일에 개입할지 묻고 답을 찾는 자리였다. ‘세상일’이란 남부 흑인 민권투쟁, 꼬집어 말하면 신생 남부조직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의 흑백분리 거부 연좌농성(Sit-in)이었다. 훗날 밝혀진바, 당시 NSA는 1947년 출범 직후부터 중앙정보국(CIA)에서 자금을 지원받던 준 관변단체였고, 당시엔 당연했겠지만 대의원 500여 명 대부분은 백인이었다.

남부 학생 대표 세 명이 잇달아 “사업장 농성은 사적 재산권과 사업자의 법적 권리를 침해하는 위법 행위”라는 요지의 연설을 한 직후, 텍사스대의 만 22세 SNCC 회원 케이시 헤이든(Casey Hayden, 1937.10.31~2023.1.4)이 연단에 섰다. “사람은 때로는 적법한 일보다 옳은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연좌농성이) 무정부주의(적 행동)가 아니라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훗날 에세이에 쓴 바 “남부 토박이 특유의 느릿한 사투리 어투에 속삭임을 간신히 벗어난 작은 목소리”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불의에 짓눌린 이들에게 ‘기다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못합니다. 그래서 몸을 사리기보다 그들 곁에 서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대의원들은 뜨거운 기립박수로 연설에 화답했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연좌농성 지지안은 통과됐고, NSA는 SNCC에 대한 인적-물적 지원도 결의했다.

미국사는 저 결의를 학생운동이 시민인권운동의 한 축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선 신호탄으로 평가한다. 64년 프리덤 라이더스의 ‘자유의 여름’이 미국 전역을 밝힌 핏빛 봉화로 타오를 수 있었던 것도 전국의 백인 학생들이 동참한 덕이 컸고, 그 현장 투쟁의 경험이 수많은 젊은 활동가들로 하여금 이후 반전 평화운동과 페미니즘, 생태주의 등 여러 영역의 운동을 이끄는 동력이 됐다. 그 역사의 변곡점에, 연대기적 역사는 기억하지 않을 헤이든의 연설이 있었다.

하지만 극히 소수나마 헤이든을 기억하는 이들은, 저 연설이 아니라 1964년 말 그가 대표 집필한 ‘운동에서의 여성’이란 제목의 SNCC 내부 성명서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것은 ‘자유의 여름’ 직후 열린 SNCC 집행부 회의에서 몇몇 여성 활동가들과 함께 쓴 운동 진영 내 성차별에 대한 첫 공식 문제제기였다. 그는 동료 활동가 메리 킹(Mary King, 현 코스타리카 평화대학 교수)과 함께 그 문건을 보완해 이듬해 당시 각 사회운동 진영에서 활약하던 여성활동가 40명에게 다시 배포했고, 그 글이 65년 11월 미국서 가장 오래된 반전 평화운동 단체인 ‘전쟁 저항자 연맹(WRL)’의 격월간지 ‘해방(Liberation)’에 ‘성과 신분계급(Sex and Caste)’이란 제목으로 게재됐다. 오늘날 2세대 페미니즘 운동에 박차를 가한 고전적 문건 중 하나로 꼽히는 글이었다.
60년대 남부 민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며, 학생운동이 시민운동으로 나아가고, 시민운동이 여성운동과 교차하도록 보이지 않는 가교 역할을 했던 케이시 헤이든이 별세했다. 향년 85세.

헤이든은 텍사스 오스틴의 “전통적 모계 가정”에서 태어나 인구 5만 명의 소도시 빅토리아에서 성장했다. 채 한 살도 되기 전에 부모가 이혼하면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마을에서 단 한 명뿐인 이혼녀”였던 워킹맘 어머니는 “아침 식사 때마다 담배를 든 채 신문을 읽으며 기사들을 논평하고, 자신이 겪던 성별 임금격차 등을 불평하곤 했다”고 그는 훗날 에세이에 썼다. 어머니가 일을 나가면 그는 5남매를 혼자 키운 외할머니와 이모의 보살핌을 받았고, 그 일반적이지 않은 모계 환경이 주변부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친연성의 뿌리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빅토리아 칼리지와 텍사스 주립대(영문학, 철학 전공)를 졸업한 뒤 59년 영문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칼리지에선 학생회 간부였고 텍사스대 재학 중엔 YWCA 사회행동위원회 회원으로서 NAACP 활동가들과 함께 대학가 분리차별 식당 등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워싱턴D.C 흑인대학인 하워드대 법대생 브루스 보인턴(Bruce Boynton)이 58년 겨울 주간고속버스로 이동하던 중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백인 전용’ 휴게소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버티다 경범죄(무단침입)로 체포된 일이 있었다. 10달러 벌금형에 불복해 그는 항소했고, 연방대법원은 60년 12월 버지니아주가 연방법(주간통상법) 상의 버스-터미널 휴게서비스의 인종차별 금지 규정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Boynton v. Virginia). 로자 파크스 사건(1955년) 이래 남부 분리차별 반대 투쟁의 첫 법적 승리였다. 헤이든 등의 시위는 저 판결조차 거부하던 백인 사업자들과 주-지방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였다.

SNCC도 그 무렵인 1960년 4월 출범했다. NAACP의 걸출한 여성 활동가로 ‘SNCC의 대모’라 불린 엘라 베이커(Ella Baker, 1903~1986)가 연좌농성 대학생들을 조직화하기 위해 마틴 루서 킹의 지원을 받아 결성한 남부지역 대학생 단체였다. 헤이든은 SNCC 원년부터 베이커 곁에서 활동했고, 베이커의 추천으로 그해 11월 NSA 대의원대회에 참가했다. 주간 고속버스에 흑인과 백인이 동승해 딥사우스 흑백 분리-차별의 심장부를 가로지른 61년 여름의 첫 ‘프리덤 라이더스(Freedom Riders)’를 현지에서 조직하고 함께 체포된 300여 명 중 한 명이었고, 63년 도리스 더비(Doris Derby, 1939~2022)와 함께 흑인 유권자 등록을 위한 문맹퇴치 프로그램을 주도했고, 64년 ‘자유의 여름’을 기획하고 현장을 지켰다.

그는 59년 연좌농성 때부터 거의 모든 시위 현장의 거의 유일한 남부 출신 백인 여성이었다. 남부 출신이어서 NSA 활동가들과 달랐고, 백인이어서 SNCC 흑인 활동가들과 달랐다. 그는 분리차별 반대운동을 “남부인인 내 자신의 문제이자 내 자유의 문제”라 여겼지만, “(백인이어서) 흑인 운동 커뮤니티의 지원자로서 그 어떤 공적인 자리에서도 뒷줄에 서는 게 나의 적절한 역할이라고 판단했다”고 2010년 에세이 ‘내 마음의 다락방에서’에 썼다.

그도 여느 활동가들처럼 성난 백인 군중에게 쫓기거나 구타당하고, 살해 위협을 받곤 했다. 냉난방 시설 없는 집에서 합숙하며 입은 옷 한 벌로 계절을 난 적도 있고, 밥을 얻어먹기도 했고, 활동비가 없어 하치하이킹으로 도시를 오가고 승용차 바닥에 담요를 덮고 숨어 이동한 적도 있었다. 그는 “그렇게 길 위에서, 더러 외롭고 두려운 적도 있었지만, 나는 또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많이 웃었고, 많이 사랑했다”고 썼다. “가장 큰 스트레스는 현장 활동가들이 다치거나 죽어가는 동안 (현장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언론사나 연방기관 등에 연락할 수 있는 극소수로 머무는 일,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현실을 견뎌야 하는 일이었다”고도 썼다. “백인 여성 활동가는 어느 현장에서든 운동을 도드라지게 했다. 운동의 가시성이 높아지지만 그만큼 위험도 커진다는 의미다. 내가 있는 것만으로 (흑인) 남성 동료들이 린치당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것도 그가 ‘뒷줄’에 선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도 물론 시몬 드 보부아르를 알고 베티 프리댄을 읽었지만, “(당시 우리는) 인권과 자유의 프레임 안에” 있었고 “여성의 권리는 큰 의미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와 여성 활동가들이 문건을 작성한 것도 운동을 보다 건설적으로 해나가자는 제언의 하나였다. A4 용지 두 쪽 분량의 성명서는 SNCC 조직 내에서 여성 활동가들이 겪은 11가지 부당한 차별을 열거하면서 시작됐다.

-64년 10월 규약 개정 모임 참가자 10명 전원이 남성이었다

-64년 미시시피 프로젝트 인력 자원 보고서에 (…여성은) ‘세 소녀(three girls)’라 표기됐다

-여성 활동가들은 지위나 경력에 관계없이 회의록을 기록하라는 요청을 받곤 한다 등등

“백인은 왜 흑인이 ‘애들(boys)’이라 불리는 것에 분개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남성우월주의는 백인우월주의처럼 널리 뿌리 깊이 퍼져 있고, 모든 면에서 여성을 불구화합니다. 유능하고 경험 많고 자격 있는 여성이 타자나 전화 업무, 서류 정리, 식사 준비 등 ‘여성적’ 역할에 자동적으로 투입되는 이유를 생각해보십시오.(…) 이 문건은 운동 현장의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역할에 행복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작성되었습니다. 여성에게 능력에 맞는 임무가 주어지지 않음으로써 값진 재능과 경험이 낭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작성되었습니다.(…) 이 세상이 백인만의 세상이 아니듯, 더 이상 남자들만의 세상도 아닙니다.”

어색한 웃음과 농담에 묻혀 진지한 토론도 개선책도 마련되지 않았다. 헤이든과 메리 킹이 문건을 다시 손봐 회의에 불참한 SNCC 여성활동가 11명과 외부 활동가 29명(흑인 16명, 백인 12명, 라틴계 1명)에게 공유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날 헤이든이 발표한 문건은 하나 더 있었다. 10월 개정된 규약에 대한 문제제기를 담은 ‘조직에 대한 메모’였다. SNCC 중앙집행부 권한을 강화한 개정 규약이 지역-지부 풀뿌리조직의 자율성을 저해할 수 있으므로 다양한 소위원회를 활성화해 현장 자율성을 보완하자는 게 요지였다. 그 제안도 수용되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듬해 4월 집행부 회의석상에서 헤이든은 ‘물에 뜬 기름 같은 존재(floater)’란 말을 들어야 했다. 조직 리더십으로부터 지나치게 독립적이라는 조롱기 어린 비판이었다. 당시 SNCC 회장이 훗날 민주당 상원의원을 지낸 흑인 민권운동의 스타 정치인 존 루이스(1940~2020)였고, 사무총장이 66년 ‘블랙 파워’ 구호로 흑인 권력의 기치를 처음 들었던 스토클리 카마이클(1941~1998)이었다.


하지만 조직 바깥에서 ‘성과 신분계급’ 문건은 여성운동의 당위성과 독자성을 부각하는 유효한 지적으로 널리 회자됐고, 특히 집행부 회의 당일 카마이클이 했던 ‘부적절한 농담’까지 곁들여져 뜨거운 논란과 함께 인권-여성운동 진영간 불화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레터에서 상술)

백인 리버럴 중산층 중심의 NSA와 공조하며 쌓여온 SNCC 흑인 활동가들의 피로감과 불만도 고조되던 무렵이었다. 64년 8월 애틀랜틱시티 민주당 전당대회 겸 린든 존슨 대선 후보 지명대회에 흑인은 유권자임에도 참가 자격을 박탈당한 데 대한 분노도 있었다. 그에 대한 반발이 카마이클의 ‘블랙 파워’였고, 혁명적 흑인 사회주의 무장단체 흑표당(66년 출범)이었다. 카리스마적 리더였던 카마이클은 66년 흑표당에 합류했고, SNCC도 사실상 와해됐다.

케이시 헤이든은 그의 60년 NSA 대의원대회 연설을 듣고 “윤리적 사고력과 시적 표현력에 반한” 미시건대 대표 톰 헤이든(Tomas Hayden)과 61년 결혼해 65년 이혼했다. 톰 헤이든은 60년대 또 다른 학생운동 조직인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회(SDS)’의 62년 신좌파 정치선언문 ‘포트휴런 선언(Port Huron Statement)’의 작성자로, 68년 반전운동으로 기소된 ‘시카고 세븐’ 중 한 명이었고, 영화배우 제인 폰다와 73년 재혼(90년 이혼)해 정계에 투신했던 저명 인권운동가다. 60년대 학생운동사를 연구한 듀크대 교수 웨슬리 호건(Wesley Hogan)은 “톰이 작성했다고 알려진 포트휴런 선언문도 케이시의 결정적인 영향력하에서 작성된 것”이라고 뉴욕타임스 이메일 인터뷰에서 주장했다.

헤이든은 65년 가을 시카고로 이주해 도시 빈민 여성들의 복지사업을 거들었고, 81년 애틀란타에서 잠깐 유권자 등록 및 교육 활동을 한 것 외에는 이후 공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선과 요가에 심취해 버몬트,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등지를 떠돌며 평화주의적 소규모 공동체의 삶을 이어갔고, 94년 사회활동가인 성공회 목사 폴 버크월터(1934~2016)와 재혼해 이민자 권익운동 등에 힘을 보탰다. 그가 남긴 마지막 공적 활동은 2010년 애리조나주 상원이 입법한 반이민법(AZ SB 1070), 즉 경찰에게 불법이주자로 의심되는 이들에게 신분증을 요구해 강제추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법을 비판한 지역 신문 칼럼이었다. ‘요새화한 미국에 대한 보이콧(Boycott ‘Fortress America’)’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60년대 시민들의 비폭력운동의 전통을 환기하며 “명백히 인종차별적인 악법에 저항”하고 “공포에 저항하며 연대하자”고 촉구했다.

그는 말년까지 SNCC 시절을 그리워했다. SNCC가 비록 사회적 성차별 관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남녀 모두 서로를 존중하며 협력했던 대단히 평등한 조직이었다고, 2010년 인터뷰에서도 말했다. “우리는 완벽하진 않았지만 거의 완벽했던, 실질적 자유와 인종-젠더의 평등, 실질적 통합을 경험한, 어쩌면 유일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그는 결혼하지 않고 파트너로 지낸 두 남성과 1남 1녀를 낳았고, 7명의 양자를 두었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