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타닐과의 전쟁 중’인 미국... 동물용 진정제 '복병' 만났다

입력
2023.02.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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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성 진통제' 펜타닐에 '자일라진' 섞어 유통
살 썩는 부작용에 해독 방해...검사에도 안 잡혀
WSJ "서서히 중독... 암살 시도와 같아" 지적

미국 사회가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의 확산으로 골머리를 썩는 가운데, 동물용 진정제가 ‘펜타닐과의 전쟁’에서 복병으로 떠올랐다.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2일(현지시간) ‘트랭크(tranq)는 펜타닐 위기를 어떻게 악화시키나’ 제하의 기사에서 펜타닐 위협이 커지고 있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트랭크는 동물용 진정제인 ‘자일라진(xylazine)’을 일컫는 속어로, 이른바 ‘좀비 마약’으로도 불린다.

자일라진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 건 정부의 강력한 단속으로 순도 높은 펜타닐을 구하기 힘들어진 탓이다. 50년 전 미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데다, 정부 규제 물질로도 분류되지 않은 자일라진은 처방전만 있으면 구매할 수 있다. WSJ는 “펜타닐을 소분해 자일라진과 섞고, 정량의 펜타닐처럼 판매하는 일이 흔하다”며 “대부분의 구매자들은 (자신이 구입한 펜타닐에) 자일라진이 포함돼 있는지도 모르고 복용한다”고 설명했다. 서서히 중독에 이른다는 얘기다.

그러나 자일라진의 부작용을 감안하면 이는 ‘암살 시도’에 가깝다는 게 WSJ의 지적이다. 중독·금단 증세는 물론, 몸이 썩어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일라진을 여러 번 투약하면 실제 몸 곳곳에 짙은 빛깔의 딱지나 변두리가 붉은 흰색 물집이 올라온다. 상처 밑 조직은 몇 시간 내로 괴사하며 살이 녹아내리기도 한다. 메릴랜드의 마약중독 지원 비영리단체 ‘희망의 소리’에서 일하는 제이슨 비너트 간호사는 WSJ 인터뷰에서 “주삿바늘을 꽂던 부위의 피부가 녹아 힘줄과 뼈가 훤히 드러난 채 센터를 찾는 이들이 늘었다”며 “화상 치료법으로 임시 조치 중”이라고 말했다.

특히 펜타닐 해독을 막아 중독자의 ‘갱생’도 차단한다. 펜타닐 치료제로 알려진 ‘날록손’(과다복용 역전 약물)의 효과를 상쇄해 중독 증상을 악화시키는 것이다. 일반 마약검사에선 검출되지도 않는다. 미 ABC방송은 “일부 마약상은 펜타닐 중독 해독을 막아 단골 고객을 확보하려고 자일라진을 의도적으로 넣는다”고 설명했다. 정밀 조사를 받지 않는 이상, 병원을 찾은 펜타닐 중독자는 치료에 차도가 없어 초조해하다 결국 죽음을 맞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자일라진 확산세가 무섭다는 점이다. 미 상무부 산하 국립표준기술연구소는 지난해 11월 필라델피아 거리에서 수집된 약물 샘플의 90% 이상에서 자일라진이 검출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같은 해 10월보다 무려 60%포인트나 늘어난 수치였다.

미국 정부도 이제 자일라진 규제를 본격화할 전망이다. 백악관 국가마약관리정책국(ONDCP)의 라훌 굽타 국장은 작년 12월 “자일라진의 위험성을 주시해야 한다”며 “의학계에서 검사를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에선 현재 하루 평균 196명이 펜타닐 과다복용으로 사망하고 있다. 특히 팬데믹 이후 중독자가 늘어 2021년 사망자 수는 2019년 대비 94%나 증가한 상태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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