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람한 겉모습과 영화 속 추격신의 강렬한 인상으로 어릴적 '007 차'로 각인된 '디펜더'. 17일 서울 성수동 디뮤지엄에서 열린 랜드로버 디펜더 출시 75주년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공개 행사에서 이 차를 다시 만났다. 1948년 암스테르담 모터쇼에서 '시리즈 I'로 세계 무대에 첫선을 보인 디펜더는 성능 테스트를 위해 차체를 45도쯤 기울여 둔 모습으로 관람객을 맞았다.
투박하고 거친 겉모습을 기대했는데, 이날 실물로 마주한 리미티드 에디션은, 웬걸 예뻤다. 열대우림 속 빽빽한 나무 옆에서도, 도심의 마천루 곁에서도 어색하지 않은 짙은 에메랄드 색상은 오래 보아도 피로하지 않았다. 재규어랜드로버코리아 측은 "초기 모델을 닮은 그래스미어 그린(Grasmere Green) 색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스미어가 무엇인고 하니, 영국 잉글랜드 서북부 웨스트모어랜드주(州)의 한 호수 이름이란다. 길이 1.6㎞의 이 호수는 산으로 둘러싸인 까닭에 하늘과 숲의 색이 어우러져 오묘한 녹색빛을 띤다. 이 차의 익스테리어와 루프뿐 아니라 20인치 알로이 휠과 센터캡에도 같은 색상을 적용해 마치 레고 미니어처를 확대한 듯하다. 이 에디션은 한국에서 단 75대만 판매된다.
지나온 세월만큼 이제는 헤리티지(Heritage, 유산)가 된 이 모델은 1947년 처음 출시될 때만 해도 농부들을 위한 맞춤형 차로, 트랙터처럼 운전대를 가운데 뒀고 쟁기질에도 썼다. 랜드로버를 고안한 모리스·스펜서 윌크스 형제는 "앞으로 2년 동안 농부들에게 매주 50대씩 판매할 것"으로 기대했다. 이들의 소박한 예상과 달리, 랜드로버는 2015년까지 전 세계에서 200만 대가 팔리며 '오프로드의 제왕'으로 자리매김했다.
놀랍게도 이 신차가 처음 투입된 전쟁터는 다름 아닌 부산과 평양 등 한반도다.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영국군이 당시 군용차로서 필요한 기능을 모두 갖춘 이 차를 대동하면서다. 이때부터 영국군은 시리즈 I부터 디펜더에 이르기까지 랜드로버의 VIP가 됐다. 영국군이 1,878대를 주문하면서 육군을 상징하는 짙은 녹색의 랜드로버는 1년에 8,000대 넘게 생산됐다.
땅(land)을 돌아다닌다(rover)는 뜻의 랜드로버가 1990년 '디펜더'라는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이런 배경과 관련이 있다. 군용차에 뿌리를 둔 만큼 군에 대한 경의를 담은 디펜더(defender·수비대)로 이름을 바꿨고 지금까지 이어진 것. 이후 1996년 영국군에 납품된 8,000대에 가까운 군용 디펜더 XD(코드네임 Wolf)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 여러 전쟁터를 누볐다.
1953년 86인치 휠베이스로 맞춤 제작된 랜드로버는 공식 왕실 차량으로 납품되면서 영국 왕실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그의 아버지인 조지 6세로부터 100번째 생산된 시리즈 I을 선물받은 뒤, 공식 석상은 물론 일상에서도 이 차와 함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왕의 남편 필립공이 2021년 타계했을 때 운구차 역시 그가 생전 직접 개조에 관여한 랜드로버였다. 2008년 인도의 타타그룹에 인수됐지만 여전히 왕실과의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다.
007 차로 불린 세월도 길다. 1983년 007 옥토퍼시에 등장한 레인지로버를 시작으로 랜드로버는 열 편의 영화에서 주행 성능을 뽐냈다. 2021년 개봉한 '노 타임 투 다이'에서는 올 뉴 디펜더와 레인지로버 스포츠 SVR, 랜드로버 시리즈 3가 등장해 거침없이 질주했다. 배우 매릴린 먼로나 소피아 로렌이 시리즈 II와 함께 남긴 사진도 오래도록 회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