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비결(土亭秘訣)은 한 해의 운세를 점(占)치는 대명사였다.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로 그해 운세를 보는 것은 조선시대부터 민간에 퍼져 있던 세시풍속의 하나였다.
토정비결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의 저작이지만, 일부에서는 그의 이름을 가탁(假託)한 책이라는 설도 제기한다.
이지함은 목은(牧隱) 이색의 6대손으로 한때 서경덕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는 관직에 전혀 뜻을 두지 않고 은둔과 기행 그리고 유랑하면서 지냈다. 그의 이런 행적은 조선시대 도가적 행적을 보인 인물들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도 소개될 정도다. 그는 물욕이 없어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면서도,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 등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마포 강변에 토실(土室)을 지어 놓고 밤에는 그곳에서 자고 낮에는 그 위를 거닐면서 정자 삼아 지냈다고 한다. 토정(土亭)이란 그의 호(號)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이지함은 60세 가까이 돼서야 특채돼 포천·아산 현감을 지냈다.
토정비결은 일 년의 운세를 판단하는 술서(術書)이다. 주역(周易)에 능통했다던 이지함은 토정비결을 주역의 괘(卦)로써 풀이하면서도 차별화를 시도했다. 먼저 주역의 괘는 육십사괘이나 토정비결은 사십팔괘로 십육괘가 적다. 또 주역은 하나의 괘에 본상(本象)이 하나, 변상(變象)이 여섯, 총 일곱 상으로 사백이십사 개의 괘상(卦象)이나, 토정비결은 백사십사 괘상으로 이뤄졌다. 괘를 만드는 방법도 연월일시(年月日時)에서 시(時)가 제외돼 사주(四柱)가 아니라 삼주(三柱)가 된다.
토정비결은 다른 점서(占書)와 마찬가지로 비유와 상징적인 내용이 많다. 예를 들면, '북쪽에서 목성을 가진 귀인이 와서 도와주리라', '꽃이 떨어지고 열매를 맺으니 귀한 아들을 낳으리라'는 등이다.
또 토정비결은 남성 본위로 여성 경시 경향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토정비결에 여성에 관한 괘(卦)는 '처녀이면 시집갈 괘' 하나밖에 없다. 오히려 '여색을 가까이하면 구설이 생긴다'는 식의 여성을 경계하는 표현이 많다. 남성 중심의 조선시대 사회상을 비춰보면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이지함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배려했다. 전체 괘의 70% 이상이 좋은 운세를 예고한다. 나쁜 운이 나올 확률은 다섯 명에 한 명꼴이다. 설령 사나운 운수가 나오더라도 끝은 희망적이다. '선길후흉(先吉後凶) 노이유공(勞而有功), 제사가신(諸事可愼) 종시유길(終始有吉)'처럼 '처음은 길하고 후가 나쁘나 힘써 임하면 공이 있다. 모든 일에 조심하면 끝내는 좋은 일이 생긴다' 등이다.
토정비결은 여러모로 정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보인다. 또한 '칠팔월에 물가를 조심하라'는 등의 '믿거나 말거나'식의 당연한 조언이 대부분이다. 더구나 해석과 예측이 그 시대에 머물러 있어 흐름에는 확실히 뒤처져 있다.
그럼에도 토정비결이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하고 장수한 비결은 다양하다. 우선 토정비결은 사언시구(四言詩句)로 이뤄지고 그 밑에 한 줄로 번역돼 있어 누구나 이해하기 쉽다. 또 괘를 찾는 방법이 체계적으로 표준화돼 있어 누구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토정비결은 주역과 마찬가지로 풀이가 은유적으로 돼 있어 그 해석의 과정이 묘미가 있으며 그 누구도 쉽게 전문가 행세가 가능하다. 특히 어려운 생활을 하거나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도 희망을 주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사람들에게 친근감과 위안을 준다. 토정비결이 인생의 지침서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새해 운세를 보는 것은 일 년의 길흉화복을 미리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준비하는 지혜가 배어 있다. 이러한 우리 고유의 전통 점서인 토정비결이 점차 사라지고 있어 아쉬움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