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이 내린 날 수목마다 눈꽃이 만발한 설국을 기대하며 제주로 겨울 여행을 떠났다. 거리가 멀다할 뿐, 한라산은 눈꽃이나 서리꽃을 볼 수 있는 육지의 명산에 비해 대중교통 접근성이 뛰어나다.
제주도에 갈 때 비행기를 이용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시간 여유가 있다면 지역의 명소를 구경하고 여객선을 타는 방법도 고려해 볼 만하다. 완도에서 여객선을 탔다. 완도항에서 다도해일출공원과 완도타워가 걸어서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여서 잠시 짬을 내면 다도해 절경을 즐길 수 있다.
제주행 배는 완도항 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오후 3시 출항해 2시간 40분 항해 후 제주항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한다. 여객선 내부의 식당, 매점, 카페를 이용하거나 게임룸, 안마좌석 등의 부대시설을 즐기다 보면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따뜻한 객실에서 달콤하게 낮잠을 즐겨도 좋다.
도착 다음날인 12월 27일 제주버스터미널에서 240번 버스를 타고 1100고지휴게소로 향했다. 한라산의 북쪽과 남쪽을 잇는 중산간도로를 관통하는 버스다. 240번 버스는 제주 시내에선 제주버스터미널, 중문에선 국제컨벤션센터(중문)에서 탈 수 있다. 여행객의 편의를 위해 2월 26일까지 토요일과 공휴일에 한라산 설경 버스를 추가 운행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차창 밖으로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1100고지휴게소에 내리자 믿기 힘들 정도로 온통 눈꽃 세상이다. 휴게소 주변에 대한민국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고 고상돈 산악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공원이 조성돼 있다. 나뭇가지마다 황홀한 눈꽃이 피었고, 경사로는 미니 눈썰매장으로 변신했다. 신나게 눈썰매를 타는 아이를 지켜보던 부모도 기꺼이 이 즐거움에 동참한다.
휴게소에서 따뜻한 음료로 속을 데우고 도로 건너편으로 향한다. 해발 1,100m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비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사계절 내내 노선버스가 다니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버스정류소다. (지리산국립공원 해발 1,172m 정령치, 1,090m 성삼재를 오가는 노선버스는 겨울에 운행하지 않는다.)
탐방로에 들어서면 675m 길이의 목재 덱을 따라 한 바퀴 돌며 산책할 수 있다.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1100고지습지’가 드넓은 설원으로 탈바꿈했다. 덱 산책로를 중심으로 눈꽃터널이 만들어졌다. 펼쳐지는 풍광마다 감탄사를 자아낸다.
한라산국립공원 등반 코스는 모두 7개. 어승생악탐방로, 석굴암탐방로는 두 시간 이내로 가볍게 걸을 수 있다. 정상까지 가는 코스는 탐방 예약이 필수다. 어리목탐방로, 영실탐방로, 돈내코탐방로는 윗세오름을 거쳐 남벽분기점으로 오른다. 삼각봉을 경유하는 관음사탐방로(8.7㎞, 약 5시간), 진달래밭을 통과하는 성판악탐방로(9.6㎞, 4시간 30분)도 백록담까지 이어진다.
이번에 선택한 코스는 성판악탐방로. 관음사 코스에 비하면 거리가 900m 길지만, 상대적으로 완만한 오르막이라 힘은 덜 드는 길이다. 지난달 28일 제주버스터미널에서 오전 6시 출발하는 281번 버스를 타고 성판악에 내렸다. 겨울 산행은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등산화에 아이젠 착용은 필수, 스틱의 길이를 조절하고 화장실까지 다녀온 후 탐방안내소에서 예약 확인을 하고 본격적인 산행에 나섰다.
편도 9.6㎞ 성판악코스는 마지막까지 오르막길이다. 4시간 30분가량 걸린다. 왕복 9시간 장시간 등산을 감안해 대피소에서 충분히 휴식하며 간식을 섭취하고 물을 마시는 등 체력을 안배하는 것이 관건이다.
초반부는 쉽다. 속밭대피소를 600m 앞두고 하늘을 덮은 삼나무 군락에 눈이 쌓여 환상적인 풍광을 자아낸다. 이정도면 인생사진 명소로 손색없다. 성판악 4.1㎞ 지점 속밭대피소를 지나면 급경사 구간 및 사라오름 갈림길이 나타난다. 욕심을 부려 무리하기보다는 나만의 페이스로 산행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7.3㎞ 지점 진달래밭대피소에서 다시 충분히 휴식할 것을 권장한다. 이곳을 통과하면 화장실도 없고, 고도가 높아져 기온이 떨어지고 바람도 거세진다. 해발 1,600m 부근 구상나무 군락지에는 눈꽃에 고드름까지 주렁주렁 달렸다. 보고 또 봐도 지겹지 않은 눈 호강이다. 이곳부터 영화로 치면 클라이맥스다. 막바지에 끝없는 오르막계단이 이어지지만,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백록담에 닿는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해발 1,950m 정상에서 펼쳐지는 신비한 호수, 백록담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야가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에도 날씨가 시시각각 변한다. 순간 흐렸던 하늘이 살짝 열리며 백록담의 설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산행의 고단함과 기다리는 동안의 추위를 잊을 만큼 신비로운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라산이 주는 겨울의 선물을 듬뿍 받은 것 같아 하산하는 발걸음이 더욱 가볍다.
성판악으로 가려면 제주국제공항에서 181번, 제주버스터미널에서 181, 281번 버스를 이용한다. 281번 버스 첫 차는 제주터미널에서 오전 6시, 181번은 6시 10분에 출발한다. 오전 5시 55분 제주시청 정류장과 오전 6시 서귀포 (구)버스터미널에서도 281번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