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기조는 우리 외교의 오랜 상식이었다. 하지만 안보와 경제를 놓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무게 중심을 달리하던 철칙이 깨졌다. 경제협력의 대상으로 중국이 아닌 미국을 꼽은 국민이 절반에 육박했다. 미중 경쟁 격화와 한중관계 악화로 균형외교, 줄타기 외교가 아닌 대미 편중외교가 강화되고 있다.
한국일보·한국리서치 신년여론조사에서 '향후 한국이 경제적으로 가장 협력해야 할 국가'로 41.8%가 미국을 꼽았다. 이어 중국 15.3%,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14.9%, 유럽연합(EU) 14.2%, 인도 3.4%, 북한 2.7%, 일본 1.6%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경제 파트너'로 중국을 바라보는 인식이 크게 후퇴했다. 앞서 아산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조사에서 중국을 꼽은 비율은 2016년 56%에 달했지만 2018년 34%, 2019년 32%로 줄곧 하향추세를 보였다. 정한울 한국리서치 전문위원은 "경북 성주에 주한미군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를 배치하자 중국이 2016년 보복성으로 '한한령'(한류 제한령)을 내린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이번 조사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협력할 국가로는 미국(63.5%)이 압도적으로 나타났다. 이어 EU(11.1%), 아세안(7.5%), 북한(5.2%), 중국(2.5%), 일본(1.6%), 인도(0.4%)가 뒤를 이었다.
이처럼 미국의 중요성이 한층 높아졌지만, 동시에 미국과의 대등한 외교를 주문하는 목소리 또한 월등히 커졌다. 한국의 국력이 과거와 비교해 눈에 띄게 성장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한국의 국력과 위상에 대해 응답자의 70.0%는 '주변 국가들과 비교해도 대등한 외교가 가능할 정도로 성장했다'고 답했다. 반면 '여전히 약소국'이라고 평가한 응답은 28.2%에 그쳤다.
한미동맹이 얼마나 균형적으로 운영되는지 묻는 질문에는 '양국 모두에 이익이 되는 수평적 동맹'(45.9%)이라는 답과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동맹'(45.4%)이라는 답이 비슷하게 나왔다. 다만, 우리 국력을 높게 평가한 응답자 중에는 한미동맹이 수평적이라고 답한 비율이 51.3%로 평균보다 다소 높았다. 한국에 대한 자신감이 미국을 향한 관점에 반영된 것이다.
실제 윤석열 정부는 '안미경중' 노선을 사실상 폐기하고 '안미경세'(안보는 미국, 경제는 세계)라는 다각화 전략을 세웠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안미경중은 우리가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며 실리를 취한다는 것"이라면서 "미국과 중국이 서로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물으며 제로섬 게임을 하는 상황에서 이 전략을 고수하긴 어려워졌고 국민들도 이를 알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