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인 캅카스 산맥 기슭의 아제르바이잔은 인근 조지아, 아르메니아(통칭 캅카스 3국)와 함께 19세기 초 러시아 제국에 편입됐다. 혁명 혼란기에 잠시 독립했지만 1922년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 병합돼 ‘소비에트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 됐다. 기원전 스키타이 유목민들의 침탈에서부터 페르시아,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로마, 셀주크 투르크(튀르크), 몽골, 오스만 제국, 영국 등 서구 열강의 개입으로 이어지는 쉼 없는 침탈과 기독교-이슬람교의 강제적 개종 등 수난의 끝이 그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에 맞먹는 이산의 아픔을 겪어야 했고, 가장 결정적인 게 19세기 러시아 제국 편입 직후 이란 북부 고원지대에 퍼져 살던, 언어와 역사를 공유하던 이들과의 민족 분단이었다. 이후 ‘남아제르바이잔’이라 불리게 된 이란의 아제르바이잔인은 본국의 680만 명보다 많은 800만 명에 달했다(1989년 기준).
1989년 11월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에 고무된 아제르바이잔인들은 그해 말 자신들의 장벽, 즉 남서쪽 이란 국경 보안 장벽 일부를 허물었다. 얼마 뒤 소련군과 이란군에 의해 장벽은 복구됐지만, 짧은 기간 남과 북은 긴 분단과 이산의 시름을 달랬다. 아제르바이잔은 1991년 10월 독립했고, 12월 당시 자치공화국 최고의회 의장이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는 12월 31일을 ‘아제르바이잔 국제 연대의 날’을 선포, 이듬해 대통령령으로 국가공휴일이 됐다. 아제르바이잔 ‘디아스포라 국가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세계 70여 개국에 흩어져 사는 아제르바이잔 이산 인구는 근년 총인구(약 1,090만 명)의 5배에 달하는 약 5,000만 명. 가장 많은 게 이란이고, 국경을 접한 튀르키예(터키)와 러시아에도 200만~30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시작되는 12월 31일과 신정 연휴는 전 세계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마음으로 만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