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났다!”
17일 오후 5시 30분. 서울 광진구 광남고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마친 한 여학생이 폴짝 뛰며 교문을 나섰다. 학교 앞엔 100명 넘게 모인 학부모들이 까치발을 들고 두리번거리며 저마다 자녀를 찾았다. 시험을 마친 자녀와 만난 부모들은 “고생했어”라고 연신 다독였고, 학생들은 엄마에게 팔짱을 끼고 “진짜 힘들었어”라며 투정을 부렸다.
수능이 끝나면 모든 수험생이 해방감을 느끼기 마련. 하지만 올해 수험생들은 허탈감이 더 큰 듯했다. 황모(19)양은 “홀가분하지만 한편으론 뭔가 모르게 아쉽다”고 말했다. 최윤나(18)양도 얼굴만 환한 표정이었을 뿐, “너무 허무하다. 이렇게 끝인가 싶다”고 얼떨떨해했다.
그 나이 또래라면 하고 싶은 일이 많기 마련이다. 황양은 “남산에서 라면을 먹어보고, 좋아하는 박물관을 모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이모(18)군은 “일단 친구들이랑 놀고 주말에 가족이랑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며 “이제 실내 마스크 빼곤 코로나19 영향도 없으니 여행 계획도 준비하고 있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학부모들의 간절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시험이 종료되기 훨씬 전부터 조퇴나 휴가를 내고 시험장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자녀를 기다렸다. 용산구 선린인터넷고 앞에서 딸을 기다리던 고소정(45)씨는 “이 학교에서 내가 2019년 영양사 자격증을 땄다”면서 “엄마도 여기서 붙었으니 기운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딸이 웃는 얼굴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모(50)씨 역시 “아들 마중하기 위해 일찍 퇴근했다. 게임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수능이 끝난 기념으로 최신 사양 컴퓨터를 사줄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코로나19에 확진된 수험생들도 무사히 시험을 마쳤다. 은평구 하나고에서 수능을 치른 이세현(18)양은 “수능 직전 코로나19 걸려 당황했다”면서도 “걱정을 하니까 몸만 더 아파 편하게 쉬는 방향으로 시험 준비를 했고, 가볍게 문제를 잘 푼 것 같다”고 자평했다.
3년째 계속되는 감염병의 파고는 수험생들도 어쩌지 못했다. 가뜩이나 올해는 이태원 참사 직후 수능이 실시됐다. 수험생이나 학부모나 국가적 비극 앞에 긴장을 해소할 ‘해방구’를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았다. 학부모 진아름(48)씨는 “오히려 아이들이 이태원 참사를 의식해 조용히 애프터 수능을 지내려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성민(49)씨도 “혹시 자녀들이 수능이 끝났다는 즐거움에 안전사고가 날까 봐 미리 데리러 왔다”고 했다. 한 수험생은 “이태원 참사 희생자 누군가는 수능을 볼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조용한 수능은 시험 뒤에도 이어졌다. 수험생들이 주로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 수능 ‘반짝 특수’는 없었다. 이날 오후 7시 ‘젊음의 성지’ 서울지하철 홍대입구역 9번 출구 앞에는 안전봉을 든 경찰관 1명이 수능일 인파관리를 위해 배치됐지만, 거리에서 수험생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홍대에서 휴대폰 케이스를 파는 임모씨는 “평일보다 유동 인구가 더 없는 것 같다”면서 “수능 특수는 옛말이고 물량만 괜히 더 준비했다”고 푸념했다. 인근에서 5년째 액세서리를 파는 A씨 역시 “이태원 참사 후 바로 상권이 죽어버렸다. 장사가 안 되는 걸 보니 애도 분위기가 계속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