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행 1위 신화 이룬 윤하 "내 진짜 모습을 사랑받는 기분"

입력
2022.11.1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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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발표한 '사건의 지평선' 7개월여 만에 차트 1위 역주행

"역주행 1위라니 정말 신기했어요. ‘거짓말인가? 몰래카메라인가?’ 생각이 들 정도였죠. (팬데믹 이후) 오랜만에 관객과 소통하며 노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는데 좋은 소식이 계속 들려오니 무대에 오를 때마다 점점 더 흥이 올랐어요.”

2004년 데뷔 이후 처음 겪는 일에 싱어송라이터 윤하는 요즘 낯선 쾌감을 만끽하고 있다. 지난 3월 발매한 정규 6집 앨범의 리패키지 버전인 '엔드 시어리: 파이널 에디션(End Theory: Final Edition)'에 수록된 '사건의 지평선'이 무려 7개월여 만에 역주행 1위 신화를 이뤄냈다. 이 곡은 지난 6일 음원 플랫폼 멜론 일간 차트 1위에 오른 뒤 일주일 넘게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가 멜론 등 음원 차트 정상을 차지한 건 2014년 ‘우산’ 이후 8년 만이다.

윤하의 음원 차트 석권이 이례적인 건 단순히 발매 후 반년이 지나 뒤늦게 차트 1위에 올랐다는 ‘역주행 신화’ 때문만은 아니다. ‘사건의 지평선’은 아이브, 뉴진스, 르세라핌, (여자)아이들 등 최근 음원 차트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는 4세대 걸그룹이나 지코, 임영웅 등 음원 강자들의 댄스, 힙합, 발라드, 트로트 장르와는 사뭇 다른 모던 록 장르의 곡이다. 3분 안팎의 짧은 곡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사건의 지평선'은 곡 길이도 5분에 달한다.

16일 서면으로 만난 윤하는 "록은 제 유년시절의 영웅이자 청춘이며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다"며 "한국 정서와 록이 다소 거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요즘 세대 가운데서도 밴드 사운드에 귀를 기울여주시는 분들이 많아 앞으로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정규 앨범은 품이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드는 비효율의 '끝판왕'이지만 스스로의 성찰을 위해 만드는 부분이 크다"면서 "내 진짜 모습을 사랑받는 기분"이라고도 했다.

'사건의 지평선'은 K팝 가사에서 잘 쓰이지 않은 천체물리학 용어를 가져와 이별에 대해 노래하는 곡이다. 제목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블랙홀의 바깥 경계처럼 한 지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 영역 바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때 두 시공간 영역의 경계를 가리킨다. 2007년 '혜성'을 히트시키며 오래전부터 우주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이번 앨범에 혜성의 순우리말을 제목으로 쓴 '살별'을 담았다. 태양계를 껍질처럼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되는 가상적 천체집단을 가리키는 제목의 '오르트 구름', '블랙홀', '별의 조각' 같은 곡도 있다.

"팬데믹으로 공연을 하지 못하면서 존재의 이유는 뭘까 궁금해하다가 유튜브에서 우주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고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개념에 꽂히게 됐어요. 우주는 알면 알수록 신기해요. 광활한 우주가 나의 삶과 맞닿고, 더 작은 세계의 법칙에서 큰 우주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건의 지평선'이란 개념도 그런 느낌이었어요. 최근에는 쌍안경을 휴대하면서 하늘을 보는 데 취미를 들였는데 날씨가 좋으면 무조건 차를 달려 별을 보러 갑니다."

'사건의 지평선'이 대중의 귀를 사로잡은 건 지난여름부터다. 6월 복합 문화 축제인 '청춘페스티벌' 공연 영상이 유튜브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화제가 된 뒤 여러 대학 축제로 이어져 Z세대를 사로잡았다. "대학 때보다 학교를 더 자주 갔던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직캠 영상'의 입소문 효과를 부정할 순 없지만 결국은 곡의 완성도가 역주행을 이끌었다. 윤하도 "차트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노래의 힘도 있었던 것 같다"며 "팬데믹 이후 첫 대면 공연 시즌이라는 점 또한 한몫한 듯하고 지금의 우리가 느끼는 것이 비슷했기에 많은 분이 깊이 공감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사건의 지평선'의 히트로 윤하를 잘 모르던 10대, 20대 Z세대 팬들이 늘었다. 그는 "팬사인회나 공연 등에서 이를 실감하곤 한다"며 "음악의 힘이 세대를 초월함을 느낀다”고 했다. 내달 2~4일 서울에서 여는 세 차례 콘서트는 예매 개시와 함께 매진됐다.

16세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가수로 데뷔해 성공을 일궜던 윤하는 어느덧 30대 중반의 중견 음악가가 됐다. '사건의 지평선'이 차트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오랜 음악 활동 기간 쌓아온 저력이 발휘된 결과다. "끝이라고 생각되는 여기가 '새로운 길모퉁이'라면 이 길이 나선형이고 '궤도'와도 같다고 생각했어요. 나의 기원을 찾는 것은 분야와 장르를 불문하고 중요한 성찰의 포인트인 것 같아요. 데뷔 때는 악바리 같은 열정으로 활동해서 딱히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쪽잠만 자도 회복되는 체력과 누가 뭐라고 해도 꺾이지 않았던 패기는 부럽긴 하지만요.(웃음)"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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