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이것 봐. 아기 모과가 땅에 열렸어!” 여덟 살 조카가 자기 키보다 작은 관목에 달린 열매를 가리키며 신기한 걸 발견했다는 듯이 말한다. 나는 조카의 손을 잡고 아파트 화단의 식물 살피는 일을 참 좋아한다. 다행히 그 아이도 재미있어 해서 우리의 산책은 늘 오래 걸린다. 지난봄에 꽃이 하도 예쁘게 피었길래 이름을 알려주었더니 마침내 열매가 익기까지 조카는 나무를 유심히 지켜본 모양이다. “그런데 모과나무는 키가 커서 열매가 하늘에 달려야 하는데 왜 이 나무는 열매가 땅에 붙어 있지?”
나는 조카를 부를 때 이름 대신 비단아, 하고 애칭을 쓴다. 아이의 한자 이름에 실제로 비단이라는 뜻이 있는 데다가 마음과 피부와 머릿결과 그 밖의 전부가 내 눈에는 비단처럼 고와 보여서다. 식물을 부르는 우리 이름도 딱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을 때가 있다.
“이 키 작은 나무는 모과나무가 아니고 모과나무의 사촌쯤 되는, 진짜 이름은 ‘명자꽃’이야. 오랑우탄이랑 고릴라가 서로 닮은 것처럼 이 명자꽃도 모과나무랑 사촌쯤 되지. 그럼 꽃도 모과나무만큼 예쁘겠지? 우리 지난번에 포항 바닷가에서 장미꽃 닮은 해당화 봤잖아. 그 해당화처럼 꽃이 예쁜데 바다가 아닌 산에서 자란다고 이 명자꽃을 ‘산당화’라고도 불러.”
명자꽃 옆에서 잎을 거의 다 떨군 채 서 있는 살구나무를 가리키며 비단이가 말했다. “얘는 추워 보여.” 나는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답했다. “봄에 일찍 꽃을 피우려고 서둘러 겨울잠을 잘 준비를 하는 거야.” 아이는 내심 마음을 놓는 표정이다. “이모가 퀴즈 하나 낼까? 오랑우탄이랑 고릴라를 닮은 동물이 또 누가 있지? 힌트는 ‘ㅊ’이야.” 조카는 신이 난 표정으로 침팬지, 하고 재빨리 외친다. “그 세 동물의 관계가 이 살구나무와 살구나무 옆의 명자꽃과 명자꽃을 닮은 모과나무의 관계와 비슷해.”
조카는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살구나무 아래 떨어진 살구씨 찾기 놀이 한번 해볼까?” 아이는 두리번거리더니 금세 찾는다. “나무껍질처럼 딱딱한 이 껍질은 진짜 씨앗이 아니고 씨앗을 보호하기 위한 갑옷 같은 거야.”
조카는 아몬드를 좋아한다. 아몬드 한 봉지를 사서 집으로 가다가 넌지시 물어본다. “아몬드가 혹시 누구의 씨앗인 줄 알아?” 아이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는 아까 주머니에 슬쩍 넣어둔 살구씨를 꺼내 보여준다. “아몬드는 아몬드나무에서 나오는데 그 나무는 살구나무와 형제야. 침팬지와 사람의 관계쯤 되지. 그래서 아몬드나무는 살구나무랑 꽃도 열매도 아주 닮았어. 아몬드나무에 열린 열매 하나를 따서 과육을 벗기면 단단한 살구씨 같은 게 나오고, 그걸 쪼개면 우리가 먹는 한 알의 아몬드가 나오지.”
아이는 아파트 화단에 아몬드나무는 없느냐고 묻는다. “아몬드는 우리나라에는 자라지 않아. ‘지중해’ 바다 근처에 있는 나라에서 아주 많이 키우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걸 사 먹을 수 있게 된 거야.” 내 말을 듣더니 갑자기 아이가 소리쳤다. “고마워, 아몬드나무야!”
집에 도착하니 현관 구석에 세워둔 우산 하나가 내 눈에 들어온다. 고흐의 명작 ‘아몬드나무’를 패턴으로 만든 그 우산을 펼치며 조카를 부른다. “비단아, 이모가 말한 아몬드나무 꽃이 여기 피었네.” 언니가 이건 또 무슨 놀이냐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조카는 손에 든 아몬드 봉지를 식탁 위에 탁 내려놓으며 자기 엄마에게 쫑알쫑알 설명을 시작한다. 엄마보다 똑똑해지는 순간이다!
조카는 꽃병에 든 장미꽃 앞으로 쪼르륵 달려간다. 장미꽃 앞에서 턱을 괴고 너 참 예쁘다, 어디서 왔니, 하면서 속삭인다. 아이를 바라보면서 언니는 그리운 무언가를 꺼내듯이 말한다. “우리도 저랬던 때가 있었지.”
식물에게 말을 걸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었을 거다. 그들이 소중한 친구처럼 여겨져서 추워 보인다고, 걱정된다고, 고맙고 예쁘다고 먼저 인사를 건네던 때가.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