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 왔습니다." 일반 가정집에 음식을 갖고 쏜살같이 달려온 배달 기사의 목소리가 아니다. 사법연수원을 수석 졸업한 백마리(김지은)는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동료들에게 "저녁 먹자"며 브랜드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흰색 쇼핑백을 보란 듯 얼굴 밑까지 들어올렸다.
"뭡니까 그게?" "찜닭이요." 선배 변호사에게 저녁 메뉴를 확인시킨 백마리가 소파에 앉아 음식 뚜껑을 하나 하나 열자 사무장은 옆에서 "이야~"라며 추임새를 맛깔스럽게 넣는다. 점잖은 척하다 그 소리를 듣고 "파스타야, 찜닭이야?"라며 뒤늦게 식사 대열에 합류한 선배 변호사 천지훈(남궁민)도 결국 "뭐야, 맛있어"라며 포크에 면을 돌돌 만다.
8일 SBS 드라마 '천원짜리 변호사'에선 이런 찜닭 에피소드가 40초 넘게 방송됐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는 '○○찜닭게티'란 스티커가 붙은 용기와 음식을 클로즈업했다. 드라마 제작을 지원하는 음식업체 제품 간접광고(PPL)다. 방송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드라마 재미있다고 해서 보는데 PPL 천국이라 당황스럽다' 'PPL 너무 대놓고 했다' 등의 비판글이 올라왔다. '천원짜리 변호사'를 챙겨 본다는 시청자 박모(46)씨는 "너무 노골적으로 하니까 보는 입장에선 흐름도 깨지고 '뭐야?' 싶더라"고 말했다.
TV 콘텐츠 속 PPL 수위가 아슬아슬하다.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PPL이 점점 더 교묘하고 대범해지고 있어서다. 종합편성 채널 및 케이블 채널과의 역차별로 인한 경영난을 주장하던 지상파는 지난해 7월 방송법 개정 후 중간 광고를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수익원을 찾았는데도, PPL에 과도하게 매달려 시청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간식 혹은 점심시간은 'PPL 타임'이다. SBS '런닝맨' PD가 "유재석씨, 투움바(파스타) 한번 드셔주실 수 있을까요?" 하고 요청하자 유재석은 파스타를 먹고(6월 5일), 양세찬은 고구마 과자를 입에 넣은 뒤 "야, 확실히 증숙고구마를 썼더니 진짜 맛있다"(5월 29일)라고 감탄했다. KBS2 예능 프로그램 '주접이 풍년'에서 장민호는 "하루에 무조건 한 잔은 마시지. 단백질을 꼭 챙겨 먹어야 되는 거야. 엄청 달달해"(2월 3일)라며 대기실에서 특정 건강 음식을 자랑한다. JTBC 예능프로그램 '뭉쳐야 찬다'에선 출연자 22명이 일렬로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하나만 먹어도 배가 차" "맛있다"(6월 19일)라고 상찬하고, 치킨을 먹으며 "순살이라 맛있네"(6월 5일)라고 놀랐다. tvN '유퀴즈 온 더 블럭'에선 유재석이 조세호와 갑자기 치킨을 먹으면서 "이게 먹으니까 트러플 향이 확 나네"라고 말하며 약 2분 30초 동안 치킨을 뜯고(2021년 4월), "아, 향이 너무 좋다"고 놀란 뒤 커피를 2분 10초 동안 마신다(2021년 5월). 모두 PPL 상품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거나 기능을 설명해 방송법을 위반한 사례들이다.
드라마와 예능 제작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인기 프로그램에서 2분여의 PPL 단가는 수천만 원대다. 예능 프로그램 제작 고위 관계자는 "인기 프로그램인 A의 경우 출연자가 PPL 제품을 먹거나 사용한 뒤 그 설명까지 하면 광고비는 8,000만원"이라고 말했다. 드라마와 예능에 연예인의 '먹방'이 자주 등장하는 배경이다. 이 먹방으로 방송사는 '배'를 채운다. '2021 방송통신광고비 조사보고서'를 보면 지상파 3사의 2021년 간접광고 매출은 397억 원으로 전년 319억 원보다 약 25% 뛰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 플랫폼이 많아지면서 연예인들의 출연료가 올라가고 제작 인력 인건비 상승으로 제작비까지 껑충 뛰어 PPL 의존도를 쉬 낮추기 어렵다는 게 방송사와 제작사들의 하소연이다.
하지만, PPL은 점점 선을 넘고 그 부작용은 간과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본보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파악한 결과, 1월부터 9월까지 올해 지상파·종편·케이블채널 PPL 규정 위반 사례는 30건으로 지난해(22건)를 이미 넘어섰다. 같은 기간 지상파는 10건으로, 지난해의 13건에 육박했다. 중간광고 전면 허용으로 방송법이 규제 완화 방향으로 재정비된 뒤 PPL까지 직접 광고처럼 적나라해지자 시민단체는 시청권 보호를 위해 규제를 더 세분화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부적절한 PPL 노출을 연속으로 오래 하면 할 수록 더 센 제재를 받게 하는 방안 등이다. 현 방송법엔 PPL 노출 시간 제한(프로그램시간의 100분의 5)은 있지만, 심의 규정을 위반한 PPL의 노출 시간에 따른 가중 처벌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다. 초 단위를 넘어 2분이 넘는 '불법 PPL'이 나오고 있는 배경이다. 한석현 YMCA 시민중계실장은 "OTT로 TV 콘텐츠를 보는 이용자도 많아졌다. 시청자 입장에선 돈 내면서 PPL을 볼 이유가 없는 것"이라며 "OTT를 통해 TV 콘텐츠를 서비스할 때는 PPL 장면을 덜어내도록 하는 방안 등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