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금수저에서 황제로... 시진핑, 중국을 틀어쥐다

입력
2022.10.1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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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철권 시대]  
①시진핑의 과거와 미래


제20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가 16일 개막했다. 10년 이상 집권 금지 원칙을 일찌감치 깬 시진핑 국가주석은 이번 당대회에서 국가주석 3연임을 확정할 것이 확실시된다. 마오쩌둥 시대 이후 15년 이상 집권에 성공한 최초의 중국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1980년대부터 이어진 중국 특유의 '집단 지도 체제'를 '1인 권력 체제'로 복구한다는 의미도 있다.

시 주석이 황제와 다를 바 없는 권력자로 거듭난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이다. 중국 공산당의 광기가 일으킨 문화대혁명(1966~1976년) 당시 가문의 몰락을 목도한 그가 가장 권위주의적 지도자 반열에 올라선 것이기 때문이다.

부총리의 아들... 금수저 물고 태어난 시진핑

시 주석은 1953년 베이징 태생으로, 아버지는 공산당 혁명 원로인 시중쉰 전 부총리이다. 유력 정치인의 아들이라는 신분 덕에 베이징 최고의 엘리트 교육시설인 베이하이 유치원과 고위 간부 자제들이 다니는 베이징81학교에 입학했다. 금수저였던 셈이다.

시 주석의 꽃길은 금세 끊겼다. 시 전 부총리는 1962년 마오쩌둥 측근의 모함을 받아 반당분자로 내몰렸고, 1969년 홍위병의 박해를 피해 산시성 옌촨현으로 하방(下放·지식인의 사상 개조를 위해 농촌으로 보냄)했다. 시 주석 가족은 7년 동안 3평짜리 토굴에 살며 노예 같은 생활을 했다. 시 주석의 이복누나 시허핑은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밤마다 석유등잔불 밑에서 책을 읽었다는 시 주석은 "하방 생활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며 어린 시절의 시련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했다.

공산당 입당 시도 10번... "아버지의 운명 피하려"


시 주석은 가족의 원수인 공산당에 등을 돌리는 선택 대신 입당에 목을 맸다. 입당 지원서가 9번 퇴짜를 맞은 끝에 1974년 당적에 이름을 올렸다.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사그라지던 1975년 칭화대 공대에 입학했고, 시 전 부총리는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공산당에 철저하게 짓밟힌 시 주석이 당의 중심으로 들어가길 갈망했던 것은 시진핑 연구자들이 주목하는 대목이다. 독일 언론인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지도자 시진핑'의 저자인 스테판 오스트는 미국 외교전문지 디플로맷 인터뷰에서 "하방 시절 시 주석은 중국의 후진성을 목격했고, 사회 개혁을 위해 공산당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며 "아버지의 운명을 따르기 싫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한 시 주석은 겅뱌오 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했다. 20년 넘게 푸젠성, 허베이성, 저장성을 돌며 행정경험을 쌓았고, 2007년 비리 사건으로 낙마한 천량위의 뒤를 이어 상하이 서기직을 꿰찼다. 10개월 만에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고, 2007년 17차 당대회에서 국가부주석으로 승진했다. 이어 2012년 19차 당대회에서 국가주석에 오르며 자신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시진핑 1인 판단에 중국 전체 운명 좌우"

"온건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을 이어갈 것"이라는 집권 초기 전망은 빗나갔다. 지난 10년간 시 주석은 통제로써 통치했다. 부패와의 전쟁을 내걸고 경쟁 세력을 제거했고, 대기업과 부동산시장에 강력한 규제를 걸었다. 홍콩과 소수민족의 인권을 탄압한다는 서방의 비판은 '내정 간섭'으로 규정하고 폐쇄적 통치 체제를 강화했으며, 고강도 검열로 정부를 비판하는 작은 목소리마저 소거해 전체주의 통치를 노골화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1인 권력 체제를 구축했지만, 시 주석 한 명의 판단에 중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위험도 그만큼 커졌다. 케리 브라운 영국 킹스칼리지 중국연구소장은 미국 외교전문지 폴리티코에 "시진핑이 죽기라도 한다면 공산당 전체가 죽을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고 있다"며 "공산당은 달걀 전부를 시진핑이라는 바구니 하나에 담는 위험을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베이징= 조영빈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