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이번에도 침묵했다. 5년 만에 일본 상공을 가로지르는 중거리탄도미사일 화성-12형을 발사한 다음 날인 5일, 북한 관영매체들은 관련 소식을 일절 싣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인 올 5월부터 보인 변화다. 그 이전에는 미사일 발사 다음 날 대대적 보도를 통해 군사력을 과시하는 패턴을 반복해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25일째 자취를 감췄다. 정권수립 74주년인 지난달 9일 방역 공로자들과의 기념사진 촬영이 마지막이었다. 올 들어 가장 긴 잠행이다. 최근 열흘간 5차례나 연쇄도발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공개행보를 자제한 셈이다. 특히 전날 4,500㎞를 날아간 화성-12형은 북한이 지금까지 발사한 미사일 가운데 최장 비행거리를 과시했다. 올 3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7형(한미는 화성-15형 결론) 발사에 성공했다며 액션 영화를 연상시키는 홍보 영상에 등장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김 위원장은 당시 “용감히 쏘라!” 문구가 적힌 친필 명령서도 공개했다.
전문가들은 우선 악화한 내부 사정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코로나19와 자연재해 등으로 식량난이 극심한데 주민들 입장에선 이틀에 한 번꼴로 미사일을 연이어 발사하는 것에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민심 이반을 고려해 북한 주민들이 보는 노동신문에 보도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실제 지난해 6월 당 전원회의에서 이례적으로 식량난을 인정한 김 위원장은 지난달 8일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도 “양곡 수매와 식량공급사업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한 과업”이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25일 열린 노동당 정치국 회의의 주요 의제도 ‘곡물 수매와 양곡 유통비리 척결 방안’이었다. 그만큼 최근 식량난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다.
상대의 반응을 보면서 움직이겠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란 해석도 있다. 김 위원장이 지난달 8일 최고인민회의에서 ‘선제 핵타격’을 법제화하고 이와 관련된 5대 조건을 명시하는 등 강한 충격파를 던진 만큼 재차 전면에 등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오히려 전략적 모호성을 취하며 한·미·일의 반응을 떠보고 이후 상황에 대비하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이 어제 쏜 화성-12형을 두고 개량형인지, 과거와 같은 기종인지 의견이 분분한 상황에서 미사일 제원 등 세부 정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전략적으로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 같다”고 평가했다. 실제 우리 군은 전날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을 중거리탄도미사일로 봤지만 미국 백악관은 ‘장거리’로 지칭했다.
북한의 이번 도발과 관련된 후속 조치 등을 논의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5일(현지시간) 오후에 열린다. 미국 등의 요구에 따른 것이지만 중국과 러시아가 공개회의 개최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이번에도 제재 결의는 물론이고 법적 구속력이 있는 규탄 결의안 채택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앞서 중국과 러시아는 지난 5월 북한의 ICBM 발사와 관련한 대북제재에 처음으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한편 한·미·일 외교차관은 이달 중 도쿄에서 북핵 대응을 위한 ‘한미일 외교차관협의회’를 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