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이겨 먹으려 국회에 출석하나. 그가 나온 날이면 야당 의원들이 면박당한 것이 화제다. 이낙연 전 총리처럼 꼿꼿한 답변으로 인기를 얻은 사례가 있으나 “너무 심플해서 질문 같지 않다” “위장탈당이 더 꼼수”라는 무안주기가 한 장관의 자산이 될지 의문이다. 정책 내용은 없고, 게임 관전하듯 소비되는 게 안타깝다. 유일한 예외는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고성도, 비아냥도 없는 둘의 설전 영상에는 ‘이탄희 의원만 만나면 동문서답 한동훈’ 같은 제목이 달린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승자가 누구냐가 아니다. 엘리트 법조인 출신 두 사람의 법이 어쩌면 저렇게 다르냐는 지점이다.
‘검수원복’ 시행령 문제를 따진 지난달 국회 법사위가 결정적 장면이다. 이 의원은 “6월 (한 장관이 제기한) 권한쟁의심판청구서에 2020년 법 개정으로 6대 범죄 외 검찰의 직접 수사가 금지됐다, 2022년 더 심화됐다(더니 8월 시행령 제정 때는) 법이 다른 범죄 수사도 허용한다고 해석했다”고 했다. “두 해석이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타당한 지적에 한 장관의 답변이 놀라웠다. “권한쟁의심판청구서는 법의 위헌성을 설명한 것이고 시행령은 법 시행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 논리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필요에 따라 법을 위헌으로 몰 수도, 시행령으로 살려낼 수도 있는 게 한 장관의 능력이겠다. 하지만 법 개정 취지가 수사 확대라면 그는 권한쟁의심판을 포기해야 옳다. 반대로 법이 수사를 제한해 문제라면 시행령이 위헌이다. 나는 민주당의 검수완박 입법을 줄곧 비판했지만 시행령 남용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이렇게 자의적으로 법을 무너뜨린다면 또 어떤 목적으로 법을 우회할지 두렵다.
법 지식을 쓰는 철학과 규범이 없다면 ‘법 기술자’일 뿐이다. 이는 한 장관을 넘어, 한 장관으로 상징되는 윤석열 정권의 문제다. 지식과 학력이 넘치지만 국민의 대표마저 무시하고 약자에는 아예 무관심한 징후, 그토록 법치주의를 강조하지만 정작 측근을 뺀 나머지에게만 엄정한 태도 말이다.
이 의원의 질문이 아픈 이유는 법 기술자들이 외면하는 문제를 들추기 때문이다. 그는 법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는 원칙을 묻는다. '처럼회' 의원들처럼 한 장관 흠집 내기 자체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대신 법이 적용되는 사람을 끄집어낸다. 엄정한 집행만 남을 때 법은 권력자의 지배 수단이나 약자를 억압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짚어낸다. 그가 오석준 대법관 후보자에게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판결이 “근래에 본 가장 비정한 판결”이라고 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 이원석 검찰총장 후보자에게 편의점 알바생이 5,900원 족발세트를 먹은 사건을 검찰이 기소하고 무죄를 받고 또 항소했다며 “뭔가 잘못 돌아가는 것 아니냐”고 지적한 이유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 종료 후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사측의 불법행위에는 어떻게 한마디가 없나”라며 “이런 걸 편파적 법치주의라 한다”고 한탄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동훈의 법’에는 없지만 ‘이탄희의 법’에 있는 것, 그것은 사람에 대한 이해다. 법 조항을 줄줄이 외워도 법은 정의를 구현하는 수단이고 정의는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는 이들이 있다. 법이 그 목적을 실현하려면 사람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놓치는 이들이 많다. 미국 연방검찰 뉴욕남부지검장으로 정계 거물들을 기소했던 프릿 바라라는 “훌륭한 조리법이 맛있는 음식을 보장하지 못하듯, 현명한 법도 정의를 장담하지는 못한다”며 “정의를 실현하거나 좌절시키는 것은 인간”이라고 했다(책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윤석열 정부가 이 사실을 기억하기를, 이를 일깨우는 역할을 이 의원이 계속해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