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추적단 불꽃에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 그분이 진짜 추적단 소속인지 알려주세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올해 1월 2019년 9월 ‘n번방’ 사건을 세상에 처음 알린 ‘추적단 불꽃’의 공식 계정으로 이런 내용의 메일이 도착했다. 누군가 불꽃을 사칭해 텔레그램에서 아동ㆍ청소년들을 성(性)착취하는 것으로 의심됐다. 불꽃 활동가 ‘단’은 곧바로 추적에 나서 제2의 n번방 주범 ‘엘(가칭)’을 추려냈다. 증거를 수집해 경찰에 신고했지만 8개월이 지나도록 수사는 진전이 없었다. 이 사이 단은 미디어플랫폼 얼룩소(alookso)에 합류해 언론인의 길을 걸었고, 지난달 말부터 엘이 불꽃을 사칭해 성착취 범죄를 저질렀다는 내용의 취재물을 공개했다.
세상은 경악했다. 고작 3년 만에 또 n번방 사건이라니. 그제야 경찰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지난달 31일 전담수사팀을 꾸렸다. 아직 엘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텔레그램 성착취는 근절할 수 없는 걸까. 불꽃 활동가 단, 원은지 얼룩소 에디터를 7일 서울 성동구 카페에서 만나 엘 추적기를 들어봤다.
3년 전 n번방 사건을 공론화한 인물이 ‘불’과 단이다. 두 이는 철저히 신분을 숨겼다. 하지만 불은 올 1월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고 여의도로 향했다.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다. 단도 얼룩소 에디터로 일하며 본명(원은지)을 공개했다. 실명을 통해 직접 취재한 기사에 책임지기 위해서다. 물론 얼굴이나 나이 등 완전한 신상 공개에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원 에디터는 엘의 활동 시작 시점을 n번방 문형욱과 ‘박사방’ 조주빈 등이 검거된 2020년 상반기 무렵으로 추정했다. 그는 “엘은 n번방, 박사방의 탄생부터 몰락까지 역사를 지켜본 인물일 것”이라고 했다. 당시 n번방 제작ㆍ유포자들이 붙잡혀 처벌을 받을 때 수사망에 포착되지 않았다가 텔레그램을 떠나지 않고 다시 성착취 생태계를 구성했다는 추론이다.
엘은 불꽃이나 여성으로 자신을 꾸민 뒤 피해자에게 접근했다. “네 개인정보와 사진이 유출되고 있으니 도와주겠다”고 미끼를 던졌다. 피해자가 덫에 걸리면 최대 10시간 동안 계속 메시지와 전화로 협박해 점차 수위 높은 성착취물을 얻어냈다.
현재 파악된 피해자는 6명. 확인된 피해 사진과 영상은 300개가 넘는다. 엘은 전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마수를 뻗쳤다. 원 에디터는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피해자도 있다”고 했다. 지금도 제보가 이어져 피해자는 더 늘어날 수 있다.
엘은 n번방ㆍ박사방 주범들보다 훨씬 철두철미했다. 원 에디터에 따르면 엘은 올해에만 4번 아이디를 바꾸고 30여 개 방을 오갔다. 지속적인 ‘세탁’으로 꼬리를 밟힐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것이다. 원 에디터는 “존재감을 과시하다가 경찰에 덜미를 잡힌 조주빈ㆍ문형욱과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엘의 범죄 수법이 피해자 지원 체계를 뒤흔든 점을 가장 걱정하고 있다. 원 에디터는 “엘이 피해자를 돕는 활동가 등을 사칭한 수법은 지원 체계의 신뢰도를 낮추는 전략이라 더 위협적”이라고 경계했다. 피해자가 누가 아군인지 구별하기 힘들어지면, 경찰과 피해자 지원센터 등이 협업하는 보호체계는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엘은 언론에 존재가 알려진 지난달 30일 오후 6시쯤 텔레그램에서 탈퇴한 후 자취를 감췄다. 여론은 다시 분노했지만, 한 텔레그램 방에서는 “언론보도 기념”이라며 엘 제작 영상이 유포되는 등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원 에디터는 “(조주빈이 검거된) 2년 전과 다를 게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어디선가 웃고 있을 성범죄자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잡힐 겁니다. 아니,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반드시요.” 원 에디터가 나지막이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