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피해자 동의 없이도 분리·보호조치 가능" 대법 첫 판단

입력
2022.09.0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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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폭행 피해자와 가해자 분리 조치
가해자 반발 기소되자 "위법한 공무집행" 
대법 "경찰, 피해자 동의 없이 분리 가능"

피해자 동의가 없어도 가정폭력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분리해 보호조치할 수 있다는 대법원 첫 판단이 나왔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공무집행방해와 공용물건손상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보호관찰과 80시간 사회봉사, 40시간 폭력 치료 강의 수강 명령도 유지했다.

피해자 B씨의 모친은 2020년 2월 7일 "서울에 있는 딸이 연락해서 남자친구 A씨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했다"고 112에 신고했다. 경찰관들이 A씨 주거지에 도착했을 때 폭행은 없었지만, B씨 얼굴에는 폭행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경찰관들은 이에 A씨에게 B씨와 떨어져 있을 것을 요구했지만, A씨는 "내 마누라가 나랑 얘기한다는데 XX"라고 소리치며 경찰관들을 밀쳤다.

A씨는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으면서도 파출소 내 물품들을 파손했다. 공무집행방해와 공용물 손상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A씨는 경찰관의 위법한 보호조치에 항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판 쟁점은 피해자 동의 없이 가해자를 분리시킨 경찰관 조치를 위법한 공무집행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였다. 1·2심 모두 정당한 공무집행으로 보고 A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경찰은 가정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른 보호조치나 응급조치를 할 수 있는데 경찰이 신고를 받고 폭행 발생 정황을 파악한 뒤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한 행위는 적법하다"고 밝혔다.

대법원 판단도 같았다. 대법원은 특히 A씨가 B씨를 '내 마누라'라고 지칭한 점 등을 근거로 B씨가 가정폭력범죄처벌법에 따른 보호조치 대상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가정폭력처벌특례법은 '가정 구성원'에 배우자뿐 아니라 사실상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도 포함된다고 규정한다.

대법원은 "가정폭력범죄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조치에 피해자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며 피해자가 분리조치를 희망하지 않더라도 경찰관이 현장 상황에 따라 분리 조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가정폭력범죄는 피해자가 가해자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기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로 분류되지만, 진정성 있는 의사표현을 뜻하는 '명시적 의사'가 전제돼야 한다. 대법원 관계자는 "가정폭력범죄처벌법에 따른 응급조치를 하는 데에 피해자 동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판시한 최초 판례"라고 설명했다.

문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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