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 A(17)양은 지난 4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만나 메시지를 주고받던 남성에게 "너의 '일탈계'(자신의 신체 일부분을 촬영해 게시하거나 공유하는 계정)에 올라온 영상물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A양은 피해지원 단체를 통해 경찰에 신고하려다 포기했다. 신고하면 부모에게 자동 통지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A양은 자신이 일탈계를 운영하다 협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모가 모르길 원했고, 결국 "성인이 되면 신고하겠다"며 돌아섰다.
A양처럼 아동·청소년이 성범죄 피해를 당하고도 신고를 포기하는 사례가 최근 늘고 있다. 수사기관에 신고하면 법정대리인에게 무조건 고지하도록 규정한 경찰 범죄수사규칙 때문이다. 법정대리인을 통해 아동·청소년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규칙이 오히려 신고를 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피해 사실이 부모에게 알려지는 걸 꺼려하는 아동·청소년 심리를 고려해 좀 더 촘촘한 방향으로 규칙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범죄수사규칙에 따르면, 경찰은 미성년자에게 출석을 요구하거나 조사할 경우 지체 없이 부모 등 법정대리인에게 연락해야 한다. 과거엔 피해자 명예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거나 2차 피해 우려가 있으면 통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예외조항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1월 이 예외조항은 가해자나 피의자가 법정대리인일 경우에만 통지하지 않는 쪽으로 개정됐다. 2020년 'n번방' 사건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보호자 미통지가 양육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전문가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문제는 규칙 개정 후 오히려 신고를 포기하겠다는 청소년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탁틴내일' 관계자는 "적극적 신고 의사를 보이다가도 부모에게 알려야 한다고 얘기하면 마음을 바꾸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며 안타까워했다. 작년에 남자친구에게 강간을 당한 한 여고생도 보호자 통지가 필수라는 사실을 접하고 신고를 포기했다. 아버지에게 수시로 폭력을 당했지만, 어머니가 늘 묵인해온 집안 분위기를 고려할 때, 부모가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위해를 가할 것으로 걱정했기 때문이다.
최근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범죄가 크게 늘고 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발표한 '2021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발생한 여성 피해자 5,109명 중 10대가 1,194명(17.2%)으로 전체 연령대 중 가장 많았다. 지난해 서울시교육청이 발표한 초·중·고 디지털 성범죄 피해 실태 조사에서도 12∼19세 4,012명 중 856명(21.3%)이 "디지털 성범죄 위험에 직접 노출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처럼 아동·청소년 피해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에 신고 기피 현상을 방치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 높다. 통지 대상을 법정대리인으로 한정하지 말고, 피해 아동·청소년과 신뢰관계에 있는 전문가 등으로 확대하는 것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법률사무소 '이채'의 조윤희 변호사는 "초기 신고 단계에선 피해 지원기관이나 상담기관 전문가가 부모보다 더 나은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수사 진행 상황을 봐가며 부모에게 고지해도 늦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도 "영미권 국가는 18세 미만이어도 의료 행위와 형사 절차의 경우, 본인 선택권을 상당 부분 존중한다"며 "우리도 이런 문화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