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해 보니 문 앞에 택배가 와있습니다. 일상 회복 이후 늘어난 회식에 체지방도 덩달아 늘자 식단 관리차 대량으로 산 닭 가슴살이 배달돼 온 겁니다. 여전히 낮엔 덥기 때문에 오전에 도착한 택배 내용물이 변질되지 않았을까 걱정도 됐지만 이내 안심했습니다. 젤처럼 물렁해진 아이스팩에 냉기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스팩에 대한 고마움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버릴지 몰라 냉동고에 쌓아놓은 아이스팩만 10개 가까이 되거든요.
코로나19로 배달이 늘어나면서 아이스팩의 생산량이 쭉쭉 늘어 2020~2021년 국내에서 만들어진 아이스팩만 4억1,546만 개가 넘습니다. 이 중 물이나 친환경 냉매를 이용한 아이스팩이 70%, 제가 받은 젤 타입 아이스팩이 30%라고 합니다. 친환경 아이스팩이야 녹여서 하수구에 버려도 되지만, 젤 아이스팩은 어떨까요? 지금부터 버려진 젤 아이스팩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 과정을 쫓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젤 아이스팩 안에 든 냉매는 고흡수성수지(Super absorbent polymer·SAP)입니다. SAP는 자기 체적(부피)의 50~1,000배의 물을 흡수하는 미세플라스틱의 일종으로, 물을 빨아들이면 압력이나 열을 가해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특성이 있어 얼음보다 보냉효과가 더 좋습니다. 이 물질은 젤 아이스팩뿐만 아니라 기저귀나 생리대에 사용됩니다.
환경부의 재활용 분리배출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이런 젤 아이스팩은 통째로 종량제봉투에 버리거나, 재활용 가능한 비닐 포장지는 분리배출하고 냉매만 일반쓰레기로 버리게 돼있습니다. SAP가 재활용 불가능한 플라스틱이기 때문입니다. 종량제봉투에 버리는 것은 매립이나 소각 처리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환경부 관계자는 "소각되면 이산화탄소와 물 등으로 배출돼 실질적으로 안전하게 처리가 되지만, 매립될 경우 SAP가 자연 분해되는 데 500년 이상이 걸린다"고 설명했습니다.
반면 냉매를 하수구에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경부가 2019년 소비자 51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5%가 이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수질 오염을 야기합니다. 미세플라스틱을 하천에 버리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미세플라스틱 섭취가 인체에 유해한지에 대해서는 아직 증명된 바 없지만, 수생 생태계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입니다.
최정훈 한양대 화학과 교수는 "물고기가 미세플라스틱을 먹고 아가미가 막혀 죽는 등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있고, 먹이사슬에 따라 더 큰 물고기들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미세플라스틱에 노출된 수생생물을 사람이 먹을 수도 있는 만큼, 대비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환경에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어, 정부는 2020년부터 젤 아이스팩 감축을 위한 대책을 내놨습니다. 젤 아이스팩 재사용 활성화를 위해 아이스팩 제작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지방자치단체별로 아이스팩 수거함의 설치·운영을 지원한다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또 물에 전분·소금을 섞어 냉매로 이용하는 친환경 아이스팩으로의 전환을 유도하기 위해, 올해부터 젤 아이스팩에 폐기물 부담금을 매기기로 했습니다. 부담금은 300g 기준 94원 정도로 책정됐는데, 이 경우 제작 단가가 친환경 아이스팩보다 조금 더 비싸진다고 합니다. 환경부 관계자는 "2022년에 만들어진 SAP 아이스팩에 대해 부과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폐기물 부담금 부과는 내년 4월쯤 이뤄지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때문에 2020년만 해도 전체 아이스팩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던 젤 아이스팩의 비중이 2021년에는 11%까지 줄었습니다.
그렇다면 일상 속에서 젤 아이스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종량제봉투에 담아 버릴 수도 있지만, 재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환경부 등이 운영하는 '내 손안의 분리배출' 애플리케이션에 따르면 올해 2월 기준으로 전국 66개 지자체(1,749곳)에 2,990개의 아이스팩 수거함이 마련돼 있다고 합니다. 수거함에 모인 것 중 재사용이 가능한 것들은 세척한 뒤 해당 지자체에 있는 육가공 업체나 시장 상인 등에게 지급됩니다.
지난해 4월부터 수거함을 운영 중인 강동구청에는 매달 2,000~5,000개의 아이스팩이 모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6만 개 정도 수거했고, 이 중 절반 정도는 재사용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강동구청 관계자는 "아이스팩에 상표가 크게 적혀있거나, 손상된 것 등은 사용할 수 없다 보니 반 정도는 폐기된다"고 했습니다.
젤 아이스팩을 가져오면 종량제봉투 등과 교환해 주는 곳도 있습니다. 시범사업을 거쳐 올해 3월부터 본격적으로 교환 사업을 시작한 대전 중구는 지난 7월까지 1만5,539개가량을 3리터짜리 종량제봉투로 바꿔줬습니다. 대전 중구 관계자는 "위생적인 재사용을 위해 포장지가 종이나 부직포인 경우는 받지 않고 있다"면서 "과태료 부과 때문인지 수요량 자체가 시범사업 때보다는 적지만, 여전히 찾는 발길이 많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