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피해자들이 많습니다.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24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대회의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는 정근식 위원장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오자 동석한 피해자 9명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누구는 만감이 교차한 듯 허공을 바라봤고, 아예 오열하는 이도 있었다.
1982년 중학교 1학년이었던 최승우(53)씨는 영문도 모른 채 경찰관에게 끌려가 형제복지원에 강제 구금됐다. 자식을 찾아 헤매던 아버지가 1986년 뒤늦게 아들을 데려왔지만, 4년의 시간은 어린 최씨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형언할 수 없는 폭력과 협박은 일상이었다.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것만 3차례. 함께 수용된 최씨의 동생은 구금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씨는 “진실규명 결정이 나와 다행”이라며 “이 자리까지 온 것 자체로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1976년 모르는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형제복지원에서 4년 동안 생활한 박경보(57)씨의 반응도 비슷했다. 가혹행위가 얼마나 심했던지 그는 지금도 다리를 저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박씨는 “수술을 여러 번 받아도 낫질 않는다”며 고통스러워했다.
진실규명은 사건의 실체를 가리는 출발점일 뿐이다. 이들은 배ㆍ보상보다 그때의 악몽에 갇혀 신음하는 피해자들을 위한 ‘트라우마 치유’를 가장 원했다. 일부 피해자는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 구제의 길이 열렸는데도,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 괴로워 조사 신청조차 꺼린다고 한다. 박씨는 “한 피해자는 쪽방촌에 살면서 영정사진을 집에 걸어놓기까지 했다”며 “바깥 세상이 여전히 두렵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씨도 일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통 속에 살았다. 그나마 상태가 호전된 것은 2015년부터 100여 차례 넘게 받은 트라우마 치유 덕분이었다. 최씨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려면 상처 입은 마음부터 보듬고 어루만져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노력이 의미 있는 첫걸음이긴 하지만,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국가의 사과 주체가 불분명한 데다, 배ㆍ보상 소송 역시 난관투성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사과를 바라고 있다. 박씨는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훼손당한 피해자들”이라며 “형제복지원 사건에 특정 정권과 이념이 개입되지 않은 만큼, 대통령이 직접 나서 책임을 인정하고 통합과 치유에 나서줬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