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인 인플레이션에 이어 불황의 그림자가 짙어지면서 세계적으로 부채위기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벌써 중국 곳곳에서 금융기관에 부채 상환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스리랑카 같은 신흥국은 외채를 견디지 못해 정권이 무너졌다. 코로나19로 풀었던 돈을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빚이 많은 주체는 한동안 생사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한국도 부채 문제에 있어 여유로운 편이 아니다. 올해 1분기 말 1,859조 원을 찍은 가계부채는 나라의 경제 규모(GDP)에 비춰 세계적으로 가장 과도하다(GDP 대비 104.3%)는 평가를 받는다. 올해 말 49.7%에 이를 전망인 국가채무비율도 아직은 선진국 평균보다 낮지만, 정부는 위태롭다며 5년 후에도 50% 중반대로 막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그래도 금융당국과 재정당국은 “부채가 아직은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며 “당장 터질 위험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눈앞에 숫자로 보이는 부채 관리도 중요하지만, 무심코 흘려 보내는 사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부채를 이미 쌓고 있는 중이다. 흔히 부채를 두고 미래의 재원을 당겨 쓰는 것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는 지금 엄청난 부채를 끌어다 쓰고 있다.
한 나라의 인프라와 복지 비용은 세금으로 충당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기록적인 저출생은 미래 납세자 규모와 직결되는 문제다. 지난해 3,694만 명이던 15∼64세 생산연령인구는 낙관적 전망으로도 2050년 2,419만 명까지 35%나 급감한다. 지금 100명이 내는 세금으로 유지되는 사회를 불과 30년 후엔 65명이 감당해야 한다. 미래 납세자를 늘릴 대비를 미뤄둔 채, 미래에 결국 더 내야 할 세금을 부채처럼 당겨 쓰고 있는 셈이다.
국민연금의 고갈 시점은 갈수록 빨라진다. 얼마 전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윤석명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올해 기준 재추계 결과, 국민연금 기금이 2056년에 소진되며 2092년까지 누적 적자가 2경2,650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밝혔다. 기금 소진 시기는 정부의 2018년 계산 때보다 1년 당겨졌고 70년 뒤 누적 적자는 5,600조 원이나 늘었다. 윤 연구위원은 “이것도 매우 보수적으로 계산한 결과”라고 했다.
고갈이 불가피하다면 지금이라도 더 내든지, 덜 받든지, 운용수익률을 높이든지 결단을 해야 한다. 연금 재원이 동났다고 국가가 “내년부턴 못 줍니다”라고 밝힐 수 있을까. 이런저런 핑계로 우물쭈물하는 사이, 우리 사회는 장차 막대한 돈을 들여 막아야 할 국민연금의 구멍을 지금 대출로 당겨 즐기고 있다.
정치적 고려를 내세워 하루하루 미루고만 있는 전기요금 같은 각종 공공요금 현실화 역시 언젠가 상환 청구서가 날아올 부채다. 국회예산정책처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공기업 부채는 약 434조 원으로 1년 만에 36조 원 더 늘었다. 특히 한국전력(146조 원), 한국가스공사(35조 원), 코레일(19조 원) 등 정부 정책에 따라 수입원인 요금을 제때 올리지 못하며 적자를 쌓는 기업이 다수다. 공기업 부실은 결국 국가가 메워야 할 미래로부터의 대출이나 다름없다.
내게 빚이 있더라도 개개인은 남의 빚까지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회수하지 못한 부채가 쌓여 은행이 망한다면 그때는 남의 일이 아니다. 세계 최고 가계부채나 고갈 위험의 국민연금이 당장 내 문제는 아니라 해도, 그 위험이 쌓여 나라 재정과 사회 안정이 흔들린다면 역시 국민으로서 피할 도리가 없다. 언제까지 미래로부터의 대출에 취해 살 수 있을까. 지금 속도만 봐도 한국은 이미 세계 최고의 부채국가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