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짓' 할 것 같다는 도쿄

입력
2022.08.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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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왜 하필 도쿄인데?”

“그야 나쁜 짓을 할 거잖아.”

넷플릭스 화제작 ‘종이의 집’ 한국판에 나오는 이 대사는 엄연한 방송사고다. 원작(스페인)에서처럼 도쿄를 비롯해 베를린, 나이로비, 덴버 등 등장인물의 이름을 도시명에서 그대로 따왔다. 그런데 도쿄의 작명 이유를 묻는 대목에 사족이 붙었다. 원작에 없는 설정이다. 과거 식민지배라는 몹쓸 짓을 한 일본이, 앞으로도 나쁜 짓을 할 거라는 반일감정을 맥락 없이 집어넣은 거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시대극도 아닌데. 일본, 그리고 일본인에 대한 결례다.

하지만 이 ‘문제의 대사’는 화제가 되지 않았다. 1년 전 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우크라이나 선수들이 등장할 때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자료 화면으로 내보낸 방송사에 쏟아진 원성과 대비된다. 해당 방송사 사장은 대사관에 사과 서한까지 보냈다. 십중팔구 한국인만 봤을 개막식 생중계에도 이리 들끓었는데, 다수 일본인이 볼 수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에는 반응이 없다니. 반일감정의 정도를 새삼 체감한다.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우리 대법원의 현금화 확정 판결이 이르면 이달 중 나온다. 2018년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1억 원씩 배상하라는 대법원 판결에도 가해기업이 응하지 않자 피해자들이 추가로 매각명령 신청에 나섰고 1, 2심은 피해자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에서도 같은 판단을 내리면 한국에 진출한 전범기업의 국내 자산(상표권, 특허권)은 강제 매각절차를 밟는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중대한 일정을 외교부를 출입하기 시작한 지난 6월에야 알았다. 상황은 심각해 보였다. 전문가들 말대로 일본 기업 자산이 강제 매각되는 순간, 한일관계는 끝장날 게 뻔하다. 파국을 막겠다며 외교부가 민관협의회를 꾸린 이유다. 피해자 측과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해법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시급한 사안이기에 매주 세 차례 열리는 외교부 백그라운드 브리핑에선 이 주제가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외교부 밖 공기는 전혀 다르다. 두 달 전 나를 보듯, 아무도 관심이 없다. 외교부가 최근 대법원에 사실상 ‘판결을 미뤄달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하고, 피해자들을 만나 “현금화가 이뤄지면 일본이 추가 보복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우려했지만, 당사자들은 물론 여론도 시큰둥하다. 한일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근본적으로 느끼지 못해서다.

이미 양국 관계가 최악이라는데 무슨 손해가 더 있는 건지 알지 못한다. 강제징용 판결에 따른 일본의 보복성 수출 규제가 4년째 이어지지만 중국의 사드 보복 때처럼 그 피해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코로나19 이후 중단된 비자면제 조치가 조속히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국민만 불편한 것도 아니다.

‘양국 관계가 좋아야 한다’는 당위는 외교부 안에서나 통한다. 피해자들이 또 양보를 해가면서, 일본에 끌려다니는 ‘저자세 외교’라는 비판까지 감수하면서 한일관계를 개선하려는 실익과 대의명분이 무엇인지 국민부터 납득시키는 게 순서다. 이게 불가능하면 외교부가 내놓을 해법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18년째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방위백서를 내고, 원전 오염수 방류 결정까지 내린 일본은 대다수 국민에게 여전히 ‘나쁜 짓을 할 것 같은 도쿄’다.


정승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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